옛날부터 자식이 태어나면 일정한 절차에 따라 태(胎, 탯줄)를 처리하였다. 민간에서는 태를 태우거나 항아리에 넣어 좋은 곳에 묻었다. 왕실에서도 좋은 날과 장소를 정해 항아리에 넣어 태를 묻었다. 좋은 장소란 풍수적인 길지(吉地)로 그리 높지 않은 산꼭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胎室)은 충북 진천의 태령산(胎齡山) 정상에 있는 신라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태실이다. 밀양시 초동면 구령산(龜齡山) 정상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고려 인종(仁宗)의 태실이 있으며, 무안면 화봉리 태봉산(胎封山)에도 「밀양 조선 성종 왕녀태실(경상남도 기념물)」이 있어, 밀양은 고려 시대 이래로 왕실의 태를 묻는 좋은 장태처(藏胎處)로 주목을 받았다.
태봉산(무안면 화봉리)
무안면 화봉리(華封里)에 있는 태실은 태봉산 꼭대기에 있는데, 이곳에는 원형의 석물과 태실 앞에 세운 표석(表石)이 남아 있다. 이곳 태실은 이미 예전에 도굴되어 태항(胎缸)은 없어지고 태항아리 위에 덮어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개석(蓋石, 덮개돌)은 마을 주민들에 의하여 옮겨져 화봉마을의 민가 담장 속의 석재로 이용되고 있다.
두 개의 표석 전면에는 『왕녀태실(王女胎室) 성화 17년 10월 10일(成化 十七年 十月 十日)』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憲宗, 1465년~1487년 재위) 성화제(成化帝)의 연호로, 조선조 1481년(성종 12)에 당시 임금인 성종(成宗)의 왕녀 태를 이곳에 봉안(奉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왕녀태실 표석
겸수 손병현(孫柄鉉, 1878~1961)이 1931~1932년간에 편찬한 『밀주승람(密州勝覽)』 하서면(下西面) 화봉리(華封里) 편에는 ‘당성공주태안우차(唐成公主胎安于此)’라 기록하고 있어, 당성 공주는 신숙 공주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밀양지(密陽誌, 밀양문화원, 1987년)』 397쪽에는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 태봉산 정상에는 조선조 제9대 성종(成宗)의 딸 신숙 공주의 태를 봉안한 왕녀태실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밀주구지(密州舊誌, 조선 후기의 필사본)』에도 “부의 서쪽 20리에 조산야리(助山也里, 화봉리)가 있고 이곳에 당성공주태(唐成公主胎)가 있다(助山也里 在府西二十里 唐成公主胎出金先生畢齊集(조산야리 재부서이십리 당성공주태 출김선생필재집)”라는 기록이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 사이에는 신숙공주(愼淑公主)밖에 없어, 『밀주구지』의 당성 공주는 신숙공주와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다.
이곳 태실 좌우에 서 있는 표지석(標識石)의 크기와 석함(石函)의 덮개돌 크기는 이미 실측(實測)되어 있다. 표석의 크기는 오른쪽 것은 높이 115㎝, 폭 36㎝, 두께 20㎝이고, 왼쪽 것은 높이 115㎝, 폭 38㎝, 두께 23㎝ 정도이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개석(蓋石)의 크기는 높이 120㎝ 정도이고 내부 크기는 50㎝ 정도이다.
성종 왕녀 태항아리 두껑
현재 이곳 태실의 관리 실태는 오랫동안 방치(放置)하였기에 당국의 조치가 매우 절실한 상태이다. 계속 이렇게 내버려 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귀중한 우리의 역사와 흔적이 영원히 사라질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 스스로가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민족이라고 자부(自負)하고 있지만, 주변 산하에 버려져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 보존‧관리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다.
못난 후손들이 아무렇게 취급하고 말살(抹殺)해 버릴 줄 알았다면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 긴 시간 정성 모아 힘들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군주와 왕실의 수복강녕(壽福康寧.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함)과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살기가 평안함)을 염원(念願)하며 썩어 없어질 어머니의 살점 한 줌을 천 리 밖 먼 여기 밀양 땅까지 봉송(奉送)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조상들이 남겨 놓은 유무형의 작은 문화유산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고 잘 보존‧관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막중한 책무(責務)를 지니고 있다. 제발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지 못하고 잃어버리기만 하는 얼빠진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