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풍운아 백호 임제선생을 만나로 가다.
나주 영모정 (羅州 永摹亭)에서 만난 시대의 가치를 거스르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풍운아 백호 선생
김오현 시민기자
승인
2023.03.13 15:00 | 최종 수정 2023.03.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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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영모정 (羅州 永摹亭)
▶ 종 별: 전라남도지정 기념물 제112호 (1987.06.01 지정)
▶ 명 칭: 나주 영모정
▶ 소재지: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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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정은 지금으로부터 503년 전인 1520년(중종 15) 귀래정 “임붕”이 본래 자신의 호를 따 창건한 귀래정이다. 정유재란시(1597) 소실되었던바 광해군 14년(1622) 효성이 지극한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영원히 추모하겠다며 영모정으로 이름을 바꿔 재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과 1991년에 다시 중건·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정자 옆에는 400여년 된 팽나무가 많이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또한 이곳 회진에서 출생하여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이름난 백호 임제 선생께서 글을 짓고 사람을 사귀었던 곳으로 문화재적 의의가 더욱 깊은 곳이라 하겠다. 현재는 나주임씨 문중종회소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영모정 바로 밑 구릉에 「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 2기가 있다.
임제선생을 만나기 위해 임붕의 정자를 찾은 이유는 임제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 글을 배우고 시를 쓰던 곳이기 때문이다. 백호 임제는 조선시대의 돌연변이였다. 시대의 가치를 거스르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고, 사랑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많은 에피소드 중 압권은 '황진이 묘소 참배 사건'이다.
서도병마사에 제수돼 부임하러 가던 길, 송도를 지나며 시담이나 나눌까 황진이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묘소에 들러 제사를 지내고 시조를 지었다는 우리가 익히 잘알고 있는 시조이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盞)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시는 좋았으나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는 이 사건으로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 당했다. 벼슬아치가 기생의 무덤에 절을 하고 시를 올리는 일은 유교적 가치를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로맨티스트 임제의 성격은 기생 한우(寒雨)와의 러브스토리에 잘 드러난다. 그는 한우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성본능을 자극하여 임제가 한우를 만나서 읊은 시 -
북창이 맑다 하거는 우장없이 길을 나서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서 잘까 하노라.
딱 신파다. 찬비 맞고 다닌데다 잠까지 추운데서 얼어 자야할 형편이라고 엄살을 떤다. 그냥 엄살만 떠는게 아니다. 속뜻을 살펴보면 늑대가 따로 없다. 작업의 고수다. 기생 한우의 이름을 한글로 풀면 '찬비'다. '얼우어'는 '남녀가 서로 교합하다'라는 뜻의 '얼우다'가 기본형이다. 다시 시를 읽어보니 이건 숫제 '19금'이다. 노골적으로 한우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내다. 프로포즈를 받은 기생 한우가 한술 더 뜬 임제에 대한 화답시 -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얼어 자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 나를 만났으니 원앙 수를 놓은 베개와 푸른 빛 윤이 나는 비단이불을 깔아서 당신을 녹여주겠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이런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해 말을 탔는데 한 짝은 가죽신이고 한 짝은 짚신이다. 말을 모는 종이 신발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을 지나는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무얼 걱정하겠느냐"고 했다. 그의 호방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에피소드다.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학가 백호 임제는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인의 기질을 가진 문인이며 16세기 호남이 배출한 조선의 위대한 문학가이다. 그는 시대를 비판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굳게 지켰고 모습이 출중하고 호방한 기상과 탈속적인 생활 태도로 후세에 많은 일화를 남겨 풍류남아라는 이름을 날렸다. 조선의 로맨티스트 임제의 흔적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모정 일대에 고스란히 있다.
2017년 4월 기아문화재지킴이 스터디 활동했던 6년전의 남도 누정문화 답사를 떠올리게 하는 봄날의 나른한 오후 시간이다.
참고자료
정기간행물김동완. "[정자] 12. 나주 영모정." 경북일보 (2016): 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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