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학계에서는 고전 해독의 관건은 문맥에 맞는 문헌고증이라고 한다. 단순한 원문의 해석만으로는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원문의 고사와 관련된 내용을 찾지 못하고 문헌고증 없이 글자풀이를 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도 수많은 고사와 용사(用事)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방대한 문헌고증작업으로 기존 번역의 오류를 모두 수정하였다.
2010년 『교감완역 난중일기』(민음사)를 간행한 이후 이순신과 관계된 문헌에 대한 발굴은 계속되었다. 그 기간이 무려 10여 년인데, 이 과정에서 새롭게 고증한 사례가 여러 건이다. 예컨대 『난중일기』 갑오년 11월 28일 이후기록에 의문의 “난도(難逃)”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앞 뒤의 문장이 없고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글자대로 “도망하기 어렵다”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이 부정확한 해석임에도 이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후 몇 년 뒤 중국의 고전적을 살펴보다가 그 “난도(難逃)”의 정확한 전고를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에서 찾았다. 104회 〈큰 별이 지고 한승상이 죽다(隕大星漢丞相歸天)〉에 보면, “제갈공명이 문방사보를 취하여 누운 의자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손수 유표를 써서 후주에게 전했다. 표의 요약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살고 죽는 것에는 상도가 있으니, 정해진 운수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장차 이르려고 하는데 저의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孔明令取文房四寶, 於臥榻上手書遺表, 以達後主. 表略曰 伏聞生死有常, 難逃定數. 死之將至, 願盡愚忠)”라는 내용이 있다. 바로 이순신이 쓴 “난도(難逃)”는 “피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여기의 “정해진 운수를 피하기 어렵다(難逃定數)”에서 유래한 것이다.
“난도” 뒤에 이순신은 31글자의 문장을 또 적었는데, 이 역시 처음에는 출처를 모르다가 나중에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의 22회편 <조조가 군대를 나누어서 원소를 대항하다[曹公分兵拒袁拒袁紹]>에서 인용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결정할 기둥(인재)이 없다.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① 增益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②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갑오년 11월 18일 이후-
위 구절은 두 개의 글이 나열된 것인데, 첫 번째는 정현(鄭玄)이 유비에게 써준 추천서의 일부 내용이고, 두 번째는 전풍이 원소에게 말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는 《삼국지》권6 〈위서〉권6에도 나온다. 유비(劉備)가 조조(曹操)를 대항하기 위해 조조가 두려워하는 원소(袁紹)에게 지원을 요청하려고 할 때, 원소와 삼대 교분이 있는 정현(鄭玄)이 유비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다. 내용은 중원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유비가 원소에게 손건을 보내어 이 글을 전하고 지원 승낙을 받았다. 이에 원소가 지원출동을 하려고 하자, 그의 부하인 모사(謀士) 전풍(田豊)이 성급한 전쟁보다는 장기전략을 세워 국가의 내실을 다져야한다며 지원출동을 반대했다.
위 두 글의 의미는 천하를 평정하기 해서는 무엇보다 국력을 키울 인재를 먼저 양성하고, 준비 없는 전쟁을 급히 하기보다는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내실을 다져 군사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원문의 해석만을 봐서는 의미 파악이 어려웠지만, 이순신이 인용한 원전을 찾아서 고증한 결과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1594년 9월과 10일 이순신은 장문포해전에서 별다른 전과를 내지 못한 부진한 상태에서 국방정책에 도움되는 삼국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스스로 경계로 삼은 것이다.
글 :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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