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 당시의 진중 상황과 전쟁 상황, 그리고 정사(正史)에도 없는 그 당시의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최고 지휘관의 신분임에도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전쟁터에서 체험한 사실을 적은 일기로는 세계역사상 유일한 것이다. 이것이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난중일기 등재 사유다.
이순신은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 7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쓰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여건이 되면 틈나는대로 실시간 일기를 작성하였다. 예로 계사년 2, 3월에 치러진 웅포해전 때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을 이끌고 원균 및 이억기 부대와 연합하여 웅천에서 왜군을 7회 물리친 뒤 4월 한 달 간은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5월부터 다시 썼다. 이때 이순신은 별지에 일기를 쓰지 못한 이유를 적었다.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意於筆硯, 而奔忙海陸, 亦不休息, 置之忘域久矣. 承此.]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
전쟁 중에서는 일기를 적지 못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일기를 쓴다고 기록한 것이다. “항상 붓과 벼루를 생각하고”, “또다시 이어 적는다”는 표현에서 난중일기에 전황을 꼼꼼히 적고자 한 이순신의 남다른 필기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내용은 완역본과 교주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이순신은 거의 매일같이 초서(草書)로 일기를 썼다. 이순신이 쓴 서체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서체인데, 웅건하고 경건하다. 글씨 형태를 얼핏 보면 맘대로 휘갈겨 쓴 것 같지만, 그러한 운필에 일정한 법식이 있다. 간혹 자기만의 서체로 법첩에 없는 글자로 변형해서 쓴 경우, 음이 같은 글자를 차용해서 표기한 경우, 모양은 비슷하나 글자가 다른 경우 등이 있었다. 이것이 후대에 《난중일기》를 해독하는데 어려운 문제였다.
1795년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가 간행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득공, 윤행임, 홍기문, 이은상 등의 학자들이 선구적인 연구를 하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미해독된 글자들이 남았었는데, 이는 초서 글씨를 일일이 분석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난중일기》전편의 글자를 대상으로 용례를 찾아 비교분석을 하였다.
<일본인의 대표적인 오독 사례>
애산(厓山) - 병신년 1월 7일
세산월(歲山月) - 병신년, 9월 11일
여진입(女眞卄) - 여진삽(女眞卅) 병신년 9월 14일
일맥금전(一脈金錢) - 정유년 5월 21일
우오미지(又五未持) - 정유년 6월 1일
노순일(盧錞鎰) - 정유년 6월 2일
그 결과 미해독된 글자들을 상당수 해결할 수 있었다. 마멸된 글자를 제외하고 용례로 분석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작업한 것이 10년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고전전문학자들이 동원되고, 문리력 중심의 해독방법인 문팔초이(文八草二, 문리8 자형2)의 원리로 분석하였다.
그 성과물로 몇 년 전 최대의 문헌고증으로 교감과 함께 완역을 진행한 결과 정본화된 교주본을 간행하였다. 이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지만, 난중일기 정본을 만든다는 소신을 갖고 뜻을 관철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의 오독을 불식하고 이순신의 정신을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오직 정통 교감이론에 기반하여 재탄생한 난중일기 정본이 전하는 참된 의미는 후대에 이순신의 정신을 되살려 이순신대중화에 바른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글 : 노승석 고전학자.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