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정본으로 이순신대중화에 힘쓰자

교감(校勘)과 교주(校註) 작업의 결실

노승석 전문위원 승인 2024.02.28 13:55 의견 0
국보 76호 난중일기 소유자 최순선, 문화재청 현충사 사진, 불허복제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전편이 암호문과 같은 초서(草書)로 되어 있다. 그 당시에 통용한 서체로 쓴 것인데, 이순신도 자기만의 서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기존 법첩의 글씨로도 해독이 안되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이를 해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고전학계에서는 《난중일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감(校勘)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던 것이다.

난중일기 원본에 잘못적은 오자나 음이 같은 글자끼리 통용하여 가차(假借)한 글자를 원뜻과 문맥에 맞게 바로잡는 작업이 교감(校勘)이다. 그런데 이를 글자 수정이나 교정(校正)이라하고 말하지 않고 왜 굳이 교감이라고 말한 것일까.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수 있겠지만, 교감은 글자를 비교하고 교정하여 원래대로 복원한다는 의미로 한중의 고전학계에서 교감학의 관용적인 용어로 오랫동안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를 따른 것이다.

돌아보면 《난중일기》교감의 역사는 1795년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유득공과 윤행임이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친필 초고본 《난중일기》가 처음 탈초(脫草, 초서의 정자화)되면서 너무 긴 문장을 줄이고, 어려운 글자를 음이 같은 쉬운 글자로 대체하고, 자형이 비슷한 글자끼리 호환한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교감(校勘)작업인데, 후대에는 이 부분이 원형의 원문과 다르기 때문에 오류라는 오해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왕명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해독된 《난중일기》가 글자상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는 엄연히 이본(異本)의 글자이므로 이를 오류라고 단정하여 정조와 그 당시 학자들의 업적을 폄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과 함께 오독된 글자들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난중일기》교감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제이었다. 20세기 중반 설의식과 홍기문, 이은상에 의해 《난중일기》번역이 처음 시작되었다. 설의식은 기존 《난중일기》에 없는 새로운 무술일기의 초본을 최초로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필자가 2007년 완역한 《충무공유사》속에 들어 있는 〈일기초(日記抄)〉이다. 홍기문은 1955년 전서본과 1935년에 간행된 《난중일기초》를 바탕으로 《난중일기》를 최초로 번역하였고, 그후 이은상이 이를 바탕으로 보완하여 1968년 《난중일기》완역판을 간행하였다.

이 세 학자들이 번역한 《난중일기》는 6·25이후 피폐한 시대상황을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하는데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문에 대한 교감은 이루어지 않아 《난중일기》해독의 한계로 남게 되었다. 21세기에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고전적도 체계화하는 작업이 주종을 이루면서 《난중일기》도 정확한 교감해독이 필요하게 되었다. 필자는 다년간 고전학계에서 통용하는 해독법을 연구한 결과, 중국의 근대 교감학자 진원(陳垣)에 고안한 사교(四校)의 교감이론과 문팔초이(文八草二, 문맥위주 해독) 방법을 적용하여 난중일기 교감과 교주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세계역사상 그와 같이 작성된 예가 없는 유일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그와 같이 작성된 또다른 일기류들이 10여 종이나 된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언(傳言)을 기록한 것이므로, 직접 전쟁을 체험한 실기의 성격이 강한 《난중일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동안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오독되고 왜곡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제는 그러한 문제점을 모두 규명하여 정본화된 난중일기판본과 번역본이 간행된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기록으로 이순신의 숭고한 정신이 올바로 전해지록 이순신대중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글 : 노승석,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