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명승 유적지 한산도

이순신의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과 한산도가(閑山島歌)

노승석 전문위원 승인 2024.02.29 08:04 | 최종 수정 2024.02.29 08:37 의견 0
통영 한산도 전양, 여해고전연구소 사진, 불허복제

통영항에서 한산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약 30분 정도를 가면 제승당 여객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행코스는 다른 이순신 유적지와 다르게 출항하는 순간부터 느낌이 남다르다. 왜냐면 바다에 진입하면서부터 이순신과 관련이 있는 해상 유적의 현장을 연이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휘황한 햇살까지 비치면 찬란한 바닷물결이 청량감과 영롱함을 느끼게 해준다.

해상의 좌측에는 이순신공원 앞에서도 훤히 보이는 작고 길쭉한 방화도(放火島)가 있다. 섬 모양이 멀리서 보면 긴 다듬이돌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를 침도(砧島)라고 한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이 섬에서 이억기와 배설과 함께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바로 옆에 또 제법 큰 섬인 화도(花島)가 있는데, 이를 화도(火島), 적도(赤島)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에 실제 이순신이 이 일대에서 진을 치고 해상 작전을 펴기도 했다.

우측에는 상죽도와 하죽도 두 개 섬이 나란히 있다. 여기에는 지금도 시누대가 자라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것으로 화살을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였다. 이 죽도 맞은편에는 관암포와 관암마을이 있는 한산도 섬이 돌출되어 있고 여기에는 높은 봉우리의 고동산이 있다. 이곳의 초입에 아주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해갑도(解甲島)다. 해갑은 게의 등껍질(게딱가리)의 의미라는 설과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쉬었다는 데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이 섬 가운데에 움푹 파인 곳은 옛날에 물의 신인 하백(河伯)을 기도하기 위해 지은 작은 목조 집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해갑도를 하백도라고도 부른다.

드디어 제승당 터미널에 도착할 때쯤 우측에는 이순신이 전쟁할 때 왜군들을 궁지로 몰아 개미처럼 기어오르게 했다는 의항(蟻項)이 보인다. 의항 안쪽에서 문어포 방향의 평지에는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시행한 과장터와 활터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여기서 연안의 길을 따라 섬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작전본부였던 제승당(制勝堂)이 있다. 본래는 산가지를 움직여 작전한다는 뜻의 운주당(運籌堂)이었는데 1739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다시 중건하여 제승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제승(制勝)이란, “제압하여 승리하다”,“승리를 만든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지만, 본래 작전한다는 운주(運籌)의 의미와 굳이 연관을 짓는다면 이는 후자의 뜻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제승당 집채 네 기둥의 주련에는 이순신의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시가 판각으로 새겨져 있다.

바다에는 가을 빛 저물어 水國秋光暮

찬 기운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네 驚寒鴈陣高

나라 걱정에 뒤척이는 밤 憂心輾轉夜

기운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네 殘月照弓刀 - 〈한산도야음〉-

이 시는 이순신의 대표적인 5언 절구시다. 이 시의 저작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필자는 1593(계사)년 가을인 7월 15일과 8월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 계사년 가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가을을 알리는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전쟁 중인 나라를 걱정하느라 밤을 지새고서 전쟁을 준비하는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다.

제승당 옆에는 멀리 한산도 앞바다까지 볼 수 있는 수루(戍樓)가 있다. 이곳은 변방의 해상을 살피는 한산도의 망루인데, 이순신은 여기서 왜군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모의하고 시를 읊었다. 2017년 11월 이순신이 직접 쓴 친필‘戍樓(수자리 수, 다락 루)’글씨를 필자가 《난중일기》에서 발췌하여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이때 이순신의 <한산도야음>시와 쌍벽을 이루는 <한산도가(閑山島歌)>도 친필로 집자하여 수루 네 기둥에 주련으로 걸었다.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깊은 근심을 할 때

어디서 한가락 강적(羌笛)소리가 더욱 근심을 더하네

-이홍의,《충무공가승》

이 <한산도가>는 원문이 1716년 이순신의 4세손인 이홍의가 편찬한《충무공가승》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순신의 작품으로 보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간혹 이 <한산도가>는 <한산도>시조와 원문이 왜 다르며 어느 것이 이순신이 지은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충무공가승》의 <한산도가>가 이순신의 작이므로, 국한문 혼용으로 된 시조는 이와 별개로 봐야 한다. 다만 <한산도>시조는 1727년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과 1763년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처음 수록되었고, 《충무공가승》보다 후에 나왔으므로 이순신의 <한산도가>와는 다른 그 당시에 유행한 시조라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한산도>시조는 저자가 이순신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 있는데다가 이순신의 처종형인 황세득(黃世得)이 지었다는 <한산도가>내용과도 비슷하므로 이순신의 작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맞지 않다.

위의 내용에서 “한가락 강적(羌笛) 소리[一聲羌笛]”는 지금까지 일성호가(一聲胡笳)와 같은 말로 왜군이 부는 피리라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 구절을 고전적에서 찾아 고증한 결과, 이는 진(晉)나라 때 시인 유곤(劉琨)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유곤이 오랑캐에게 포위되었을 때 달 밝은 밤에 성의 누대에 올라가 호가를 부니, 오랑캐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향 생각에 젖어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일성호가는 고향 생각을 나게 하는 피리소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의 <한산도가>의 한문가사와 시조가 지금까지 혼용되고 잘못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후대의 여러 문헌에도 한문가사가 이순신의 작으로 그대로 전해 오고 있지만, 세간에는 시조를 먼저 말하는 이들이 더 많은 상황이다. 요컨대 한 인물의 작품은 시대적인 배경 분석과 함께 원전의 용어를 잘 파악해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날로 각박해져가는 현대사회에 이순신의 남다른 우국충정이 담긴 <한산도가>의 의미는 자신을 성찰하게 하여 어둔 밤을 비추는 환한 달처럼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글 :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 자문위원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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