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의 성패를 좌우하는 조상거리
굿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대부분의 굿거리는 천지신명을 모셔 의뢰자의 소원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즉 무당들이 모시는 신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바라는 바를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굿에서 의뢰자는 굿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굿에 동화될 수가 없다.
무당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을 하라고 하면 절을 하고, 공수를 주면 받고 하는 식이다. 의뢰자가 신의 감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과 정성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굿거리 중 큰 거리라고 하면 황해도굿에서는 칠성거리, 감응거리, 비수거리를, 서울굿에서는 산신거리, 불사거리, 장군거리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큰 거리는 아니지만 그 굿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거리가 바로 조상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굿의 성패, 즉 의뢰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기 위해서는 신명거리도 중요하지만, 의뢰자 조상들의 한을 풀어주고 조상들의 음덕을 받아야 의뢰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상거리는 의뢰자의 직계 조상부터 4대 조상까지 모두 굿청에 불러서, 그중 한이 많은 특정 조상을 몸에 실어 살아생전에 하지 못하였던 말, 듣지 못했던 자손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에 맺혀 있는 한을 풀어주는 굿이다. 조상의 한을 풀어주었을 때 조상의 음덕을 바랄 수 있고 조상의 도움으로 의뢰자의 소원이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무당들은 조상거리를 잘하지 못한다. 이 말은 죽은 조상들의 넋을 무당들이 몸에 잘 싣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한 많은 조상들을 몸에 실어 넋두리를 구성지게 함으로써 의뢰자는 무당에게 빙의 된 조상과 부둥켜안고 가슴속에 맺힌 말들을 풀어내는 것이 조상굿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상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진정으로 자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렇게 넋두리를 구성지게 하는 무당을 찾기가 보통 힘들지 않는다.
지금 무당 중 정확하게 조상을 몸에 싣고 조상의 살아생전 모습을 재현할 무당이 몇이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즉 조상을 몸에 실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조상거리를 할 때는 조상거리는 참관을 안 해도 된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의뢰자는 아버님 어머님의 귀신이라도 만나고 싶어 굿을 하는데 조상거리는 보지도 못하게 하고 돌려보내면 그것이 무슨 굿이며 의뢰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상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니 의뢰자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가 없고 굿덕이 없다고 뒷말이 무성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많은 굿거리 중 의뢰자가 직접 동참하고 이해할 수 있는 굿은 바로 조상거리다. 조상굿을 멋들어지게 하여 의뢰자와 한바탕 껴안고 울며 넋두리하였다면 의뢰자는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다른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굿판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무당의 입을 통하여 다 풀어냈기 때문이다.
조상거리는 조상, 즉 아버지 어머니가 빙의된 무당의 넋두리에서 평소에 자주 하던 말과 말투, 그리고 자주 먹었던 음식 이야기를 하고, 평소에 하던 버릇을 재현할 때 의뢰자를 비롯한 이웃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굿에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거리는 화해동참(和解同參), 해원상생(解冤相生)을 대표하는 굿거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감히 단언하건대, 조상을 잘 싣지 못하는 무당은 자격이 없다. 굿을 할 때 조상거리에 참여시키지 않고 의뢰자를 보내는 무당은 조상을 몸에 실을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굿을 할 때 의뢰자는 조상굿은 꼭 참여하겠다고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현존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천지신명은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심이 없다. 신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깨우침과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 인간들이 잘 먹고 잘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자기 몫이다.
그러나 조상은 자손들의 길흉화복에 관심이 많다. 그러기에 조상이 도와야 후손들이 어려운 일없이 소원을 이루고 잘 살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조상거리를 잘할 자신이 없으면 조상거리 전문 무당을 초청하여 함께 했다. 망자를 몸에 실어 넋두리를 잘하는 무당이 있어야 모두가 흡족해했다.
그러나 요즘 굿은 조상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간단하게 타불을 하면서 조상천만 찢어나가면 되는 조상거리가 성행하기 때문이다.
신명거리 굿은 무당 자신이 시작과 끝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조상거리는 조상이 몸에 실리기 시작하면 술을 먹거나, 울거나, 심지어 소변도 싸버리는 등 무당이 원하지 않는 행동도 통제하지 못하고 하게 된다.
또 의뢰자는 부모님이 평소 행동과 말투, 그리고 애창곡 등을 통하여 부모님이 오셨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굿은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조상거리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예전엔 조상거리만 잘하여도 큰무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라도 굿을 의뢰받을 때는 조상거리는 반드시 당주 무당이 해야 한다.
본인이 조상거리에 자신이 없으면 예전처럼 대신 다른 사람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굿을 하고 난 뒤 굿 덕을 봤다는 좋은 소리를 들을 것이며. 진정한 우리 굿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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