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생가를 찾아서

-울산의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의사
-울산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

전순희 시민기자 승인 2024.07.27 05:57 의견 0
박상진의사 사형집행 기사 '동아일보' 1921년 8월 13일자

박상진 사형 집행 11일 하오 1시 대구감옥에서 박상진은 13분만에 절명되어

위 기사는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의사가 대구감옥에서 순국한지 이틀뒤인 1921년 8월 13일 동아일보 대구특전에서 보낸기사이다.

고헌 박상진의사 생가 입구의 모습


일제 강점기하에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 총사령관이셨던 고헌 박상진의사의 생가는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5로 10 에 있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고 생가도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사업을 완료하였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 구조를 가진 조선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최근 정비사업으로 입구에 심어놓은 무궁화꽃이 활짝 피었다

1. 광복회의 의의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로는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의협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활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1910년 국개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3.1운동으로 민족 엵량이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중앙에 박상진의사, 오른쪽에 계시는 분이 소몽 채기중독립운동가 왼쪽이 청산리전투 김좌진 장군


광복회 회원 많은 분들이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며, 이진룡부사령관은 1918년 5월 사형 순국하였으며, 장두환는 옥중에서 서거했다. 박상진과 김한종이 1921년 8월 11일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8월 12일채기중, 김경태, 임세구, 강순필이 서대문 감옥에서 사형 순국했다.

광복회는 그 당시부터 공화주의를 위해 노력하였고, 다른사람이 아닌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다.

1984년 12월 송정생가에서 태어나서 1921년 8월

35세의 짧은 생을 사셨지만 독립을 위해 전재산, 가족, 하나뿐인 목숨마져 초개와 같이 바치고 간 울산의 독립운동가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없이 자랐지만,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아이로 남달랐다고 한다. 왕산 허위선생을 만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고,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지원에 발령받았으나 식민지 치하에서의 치욕스러운 벼슬길을 버리고 무장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하였다.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은 광복회 4대 강령이다.

어머니 위독 소식을 받고 집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일제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

사형집행 후 박상진의 시신은 대구에 있는 박시규의 임시처소로 옮겨졌다. 이틀 후인 8월 13일 오후 4시, 박상진의 우해는 열차편으로 경주에 도착하였다. 집안의 어려움으로 장인이 자신의 무덤으로 정했던 곳을 내어주어 8월 20일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박상진의 장례에는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땅이 꺼질 듯 통곡하며 의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전한다.

그러한 8월이 다가오고 있다.

박상진의사 생가 근처에 있는 박상진 호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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