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백의종군 여정길

인고의 정신

노승석 전문위원 승인 2024.04.30 10:54 | 최종 수정 2024.04.30 14:57 의견 0
국보 76호 난중일기 소유자 최순선, 문화재청 현충사 사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잃고 27일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하는 중에 아산에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뼈절인 아픔을 느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 1597년 4월 1일 한양 의금부에서 출옥한 후 과천, 수원, 오산, 평택을 지나 4월 5일 아산의 선영에 도착 후 15일간 머물렀다.

그후 4월 19일 남행길에 올라 20일 이순신은 공주를 거쳐 논산 이산현의 관아 동헌에서 유숙했다. 여기는 현재 남은 것이 없고 5백여 년 된 느티나무가 옛 동헌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튿날 익산 여산(礪山)의 관노집에서 잤는데, 홀로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현재 여산면에 여산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23일 아침 오원역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고 아침식사를 했다. 오원역은 임실군 관촌면 오원 강변에 있는 역참으로 현재는 이 부근에 사선루가 남아 있다.

그후 남원을 지나 원수 권율이 순천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을 향해서 갔다. 27일 순천 송원에 이르자, 권율이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위로해 주었다. 송원은 순천 서면 운평리 송치 안에 소재하며 솔원이라고도 한다. 다음날도 권율이 군관을 보내어,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 되는대로 나오라”고 하였다. 상중인 것을 알고 배려한 것이다. 인근의 관리들이 이순신에게 오가며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조정에는 논자들의 의논이 심하게 양분되어 서인(西人)은 원균을 지지하고, 동인(東人)은 순신을 지지하여 서로 공격만 하고 군대 일은 안중에 없었다.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 부임하자 이전의 규정을 모두 변경하고 모질고 괴팍하게 행동하니 군사들이 원망하고 분해했으며, 술주정이 심한데다 형벌에 법도가 없어서 호령을 해도 시행되지 않았다.

5월 단오절 원균에 대한 갖가지 안 좋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의 패악함을 전하고 장졸들이 이탈하여 형세가 위태롭다고 전했다. 이순신은 천애의 땅에 와서 멀리 종군하여 어머니의 장례도 못치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古今)에 둘도 없을 터이니, 가슴 찢어지듯이 아프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난중일기》정유년 5월 5일 -

8일 권율의 명령으로 원균도 조문편지를 보내왔다. 이경신은 원균이 서리의 아내를 간음한 사건을 전했다. 이순신은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이다.”하였다. 12일 이순신은 자신을 모함한 원균이 여러 가지 문제로 상황이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신홍수(申弘壽)를 시켜 원균에 대한 주역점을 치게 했는데, “첫 괘가 수뢰둔水雷屯괘 가 나왔고 이것이 변하니 천풍구天風姤괘 가 나왔다. 용괘用卦가 체괘體卦를 극하여 크게 흉하다.”고 하였다.

이 점괘에서 “용이 체를 극하여 크게 흉하다.”는 것은 소강절의 체용론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천풍구괘는 건상손하(乾上巽下)로 구성되었는데, 위의 괘는 다섯 번째 양효가 포함된 상괘(소성괘)인 건(乾)괘가 용괘가 되고, 남은 하괘인 손(巽)괘가 체괘가 된다. 이 두 괘를 오행으로 보면 건괘는 금(金)이고 손괘는 목(木)에 해당하므로, 금이 목을 극하여(金剋木) 상극 관계가 된다. 따라서 금에 해당한 용괘가 목에 해당한 체괘를 극하여[用剋體] 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점은 결국 원균이 63일 이후 칠전량 해전에서 패망함을 예고한 것이다.

14일 이순신은 순천을 떠나 찬수강을 지나 구례의 손인필 집에 도착했는데, 낮고 누추한 집에서 숙박했다. 찬수강은 구례군의 신촌마을 강변으로 상류를 상찬수, 하류를 하찬수라고 부른다. 이때 남원의 정탐군이 와서 체찰사 이원익이 곡성을 경유하여 진주로 갈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20일 체찰사 이원익이 이순신에게 군관을 보내어 조문을 하였다. 이날 밤 체찰사를 만났는데, 그는 하얀 소복을 입은 채로 원균의 기만행위를 말하고 선조의 무능함을 개탄하였다. 박천 군수 유해(柳海)가 와서 당시의 형벌제도를 말하는데, 고소한 사람이 형장을 맞아 죽어가고 물건을 바쳐 석방되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백냥의 돈으로 죽은 혼도 살린다.”고 말하여 그 당시 사회의 형벌제도가 문란함을 비판했다.

23일 이순신이 초계로 가겠다고 하니, 이원익은 쌀 두 섬을 체지(물품권)로 써서 주었다. 다음날 이원익의 군관 이지각(李知覺)이 이순신에게 경상우도의 지도를 그려달라고 해서 그려주었다. 26일 폭우가 심하게 내릴 때 하동에 사는 이정란의 집으로 갔는데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체면을 가리지 않고 아들 열을 시켜서 억지로 들어가서 잤다. 그후 28일과 29일 이틀간 하동현에 유숙했는데 현감이 원균의 비행을 말했다. 현재는 하동읍성터에 구벽과 오래된 팽나무가 남아 있다.

6월 1일 이순신이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서 쉬었다. 청수역은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부근에 복원되어 있는데, 실제는 건너마을 농지안에 있었다고 한다. 이날 늦게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노비집에 투숙했는데, 누추하여 간신히 밤을 보냈다. 박호원의 노비집은 바로 박호원의 재실인 이사재(泥泗齋) 안에 있었다.

2일 이순신이 산청 단계(丹溪)를 거쳐 늦게 삼가(三嘉)현에 도착했다. 지금은 삼가현의 부속건물인 기양루(岐陽樓)가 남아 있다. 기양루는 합천의 옛 명칭인 삼기현의 ‘기’자와 강양군의 ‘양’자를 따온 것이다. 현감이 없는 빈 관가에서 유숙하는데,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와서 먹으라고 하나 이순신은 종들에게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후 삼가현 5리 밖의 홰나무 정자에서 노순(盧錞)과 노일(盧鎰)형제를 만났다. 현재는 그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홰나무정자가 남아 있다. 이튿날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종들이 이순신의 분부를 어기고 고을사람들의 밥을 얻었다. 이 사실을 안 이순신은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되돌려 주었다. 이순신은 비록 백의종군하는 중에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4일 이순신은 합천 관아에서 4km되는 곳에 괴목정이 있어 아침을 먹었다. 괴목정의 위치는 합천 대양면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주민들은 40여년 전 이곳에 4백여 년 된 홰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합천군까지 4km이고 2km를 더 가면 합천군과 초계로 가는 두 갈림길이 있다. 이 갈림길에서 4km를 가니 멀리 적포뜰에 있는 권율 진영의 수(帥)자 기(旗)가 보였다. 권율은 율곡면에 1593년 12월 25일부터 병영을 설치했는데, 현재의 지번으로는 율곡면 영전리 385번지이다. 이 병영 맞은편 둔전마을에 이순신이 농사지은 논과 무밭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합천의 향토학자 이강중님과 세거해온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고증되었다. 여기서 8km지점 백마산성 아래 권율이 군사 수백명을 훈련시킨 습전곡이 있었다. 개연(介硯, 개비리)으로 걸어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고 강물이 깊고 건너지른 다리가 높았다. 개비리는 합천 율곡면 문림리와 영전교 부근까지 기암절벽을 이룬 산으로 요새지로서 적합했기에 만 명의 군사도 지나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6일 모여곡의 이어해 집에서 기거하는데 잠잘 방을 도배했다. 모여곡은 옛날부터 매화나무와 모개나무가 많아서 매야, 모개라고 부른 것이 모여곡이 된 것이다. 현재 여기에 이어해 후손이 살던 집이 있는데, 실제 이어해 집은 매실마을 입구 좌측에 있었다고 한다. 8일 이순신이 점식을 먹은 뒤 드디어 도원수 권율을 진영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복병 파견에 대한 공문을 보고 작전업무를 도왔다. 백의종군하여 권율의 진영으로 들어가라는 왕명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 지 69일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튿날 이순신은 무기와 칼을 갈기 위해 율곡면 매실마을에 있는 산골짜기에 가서 숫돌을 채취했다. 필자는 합천 향토학자 이강중님의 증언을 듣고 그 숫돌 채취장소를 찾아갔는데, 과연 그곳에는 지금도 숫돌이 많이 박혀 있었다. 10일에 이순신이 가마말과 워라말, 간자짐말, 유짐말 등의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고, 6월 26일에 워라말이 죽어서 버렸다고 한다. 실제 매실마을에는 이순신이 말을 묻었던 말두덤골도 남아 있다.

그 당시 임시사령부로서 권율의 진영은 지금의 합천 율곡면 영전리에 있었다고 앞서 언급했다. 이곳은 주변 상황과 거리를 측정해 볼 때 《난중일기》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한산도 진영으로 보낼 편지와 3도 및 각 해안기지의 담당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작전 정보를 전달했다. 도원수 권율을 보좌하면서 작전을 도모한 것이다.

특히 권율은 이순신에게 원균의 일은 흉악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고 말하고, 원균이 왕명에 반하는 무모한 작전을 감행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하며 원균을 더 이상 지휘할 수 없다고 했다. 일찍이 선조가 안골포의 적을 경솔히 공격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원균은 무리하게 안골포해전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처럼 조선수군의 대응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이순신은 조선군에게 식량을 공급할 둔전과 무밭 관리에 주력했다. 이러한 중에 6월 26일 아산에서 모친의 장사소식을 듣고 그리움과 비통함을 드러냈다. 간혹 한산도 일대의 수군 부하들이 찾아와 전쟁 상황을 전했다. 7월 18일 이순신은 부하 이덕필과 변홍달을 통해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과 이억기, 최호 등이 전사한 소식을 들었다. 분한 심정을 참지 못한 이순신은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한 후 다음날 단성의 동산산성에 올랐다. 이는 단성현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백마산의 산성으로 지금은 산청구 신안면 중촌리에 있다.

이때 이순신은 “동산산성에 올라 그 그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산성은 등반로를 찾기 힘들고 길이 매우 험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이곳이 사통발달의 요새지임을 알 수 있다. 정상에 산성의 터가 남아 있고, 불에 탄 암석과 깃발을 꽂았던 구멍 난 바위가 있으며, 약 1km되는 절벽아래 진주 진양호로 흐르는 남강의 상류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단성, 남쪽으로는 적벽산이 보인다.

이상으로 이순신의 69일간의 백의종군하러 가는 여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잃고 27일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하는 중에 아산에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뼈절인 아픔을 느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백절불굴의 정신은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 준다. 특히 이 기간에 보여준 이순신의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한 몸이 분골쇄신이 될지라도 최악의 고통을 감내하며 인고(忍苦)의 노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점에서 7년 전쟁 기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여해)

<이충무공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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