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은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경남 합천에 있는 권율의 진영으로 가기 위해 60여 일간의 남행길에 올랐다. 그간 옥살이로 《난중일기》를 쓰지 못했는데 다시 붓을 장만하고 당시 관원들의 통행규정에 따라 전라좌도와 경상우도의 통로인 과천과 충청우도와 전라우도의 통로인 수원을 거쳐 아산에 도착한다.
이때 뜻하지 않은 모친의 상사로 이순신은 참담한 심경을 느끼며 초상을 치르고 조상의 사당과 모친의 영전에 고유(告由)를 하였다. 《주자가례》〈사당〉조에, “멀리 수십일 이상을 출행하게 되면 사당에 재배 분향한다.”고 한 예법에 따라 떠나가는 자의 예를 다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나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돌아가셨네”(《행록》)
그후 이순신은 여산(礪山, 익산)과 남원에 가서 변변치 않은 종들의 집을 전전하며 유숙하였다. 4월 24일 마침 권율이 순천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도 순천으로 갔다. 권율은 군관 권승경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위문을 하고,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 되는대로 나오라”고 배려해주었다.
5월 2일 진흥국이 와서 원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3일에는 둘째아들 울(蔚)의 이름을 열(䓲)로 고쳤다. 이때 이순신이 일기에 적은 이름풀이에 대해서는 그 출전을 밝힌 적이 없었는데, 필자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열(䓲)의 음은 열(悅)이다. 싹이 처음 생기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다.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朝以蔚改名䓲, 䓲音悅, 萌芽始生, 草木盛長. 字義甚美)” 이는 당(唐)나라 때 혜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24권에서 중국 진(晉)나라 때 학자인 곽박(郭璞)이 서한(西漢)의 양웅(揚雄)이 지은 《방언》과 운서인 《고성(考聲)》의 내용을 인용하여 주석한 것임을 처음 밝혔다.(《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은 이 기간 중에 부하들로부터 조선 수군의 상황과 원균의 비행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는다. 이때 원균은 패악한 행동으로 부하들에게 신망을 잃고 장졸들이 떠나가는 상황이었다. 권율의 명령으로 원균도 이순신에게 조문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순신은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이다.”라며 원균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14일 이순신은 구례에서 체찰사 이원익이 보낸 군관의 조문을 받았다.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호하기 위해 극구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때 한편 평안북도의 박천 군수 유해(柳海)가 와서 당시의 형벌제도를 말하는데, 이순신은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린 사람이 물건을 바치고 석방되는 행태를 보고 개탄하였다.
“과천의 좌수(座首, 유향소 수장)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公)에게 말과 스무 살 난 여자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安, 홍제)은 본디 죽을죄도 아닌데 누차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야 석방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百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一陌金餞便返魂].”는 것이리라.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일맥금전편반혼(一陌金餞便返魂)은 필자가 10여년 전에 이순신이 명나라 때 구우(瞿祐)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라고 처음으로 고증하였다. 이는 물품에 의해 죄의 경중이 정해지는 현실을 풍자한한 시구인데, 여기의 “맥(陌)”자가 일본인이 해독한 《난중일기초》에는 “맥(脈)”자로 오독되어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일맥금전(一陌金餞)은 백장의 종이돈(一百錢)으로 한 꿰미의 돈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수호전》,《오입도원》,《박옹시초》,《연경잡지》등에 나온다. 강직한 선비 영호선(令狐譔)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는데, 어느 날 오로(烏老)라는 이가 죽었다가 그 가족들이 불사(佛事)로서 많은 돈을 불살라 소생했다는 말을 듣고 돈으로 환생한 것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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