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국가 발전을 위해 올바른 창조 경영과 인재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상업화·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배금주의 사상이 갈수록 팽배해지는 때 우리는 참된 경영과 교육의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생존 경쟁을 위해 실리 추구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의 본질적인 도덕문제에 대한 성찰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한마디 편언(片言)일지라도 인간사의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을 따져 본다면, 도덕이라는 덕목은 인간사의 근본이기 때문에 항상 중시 되는 것이다. 자연의 현상이 순환하고 사물의 군상이 변화하는 것도 일정한 질서와 법칙이 있어서 가능하듯이, 인간사회도 변화 발전하는 것이 도덕규범이라는 통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정치하는 데에 도덕이 절대적임을 강조하고, 손무(孫武)가 도덕이 임금과 백성을 화합하게 한다고 했듯이, 결국 도덕이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됨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진말(秦末)의 은사이자 병법가인 황석공(黃石公)은 인간사에서 우선해야 할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할 것은 덕을 닦는 것 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고 先莫先於修德
즐기는 것은 선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즐길 것이 없다 樂莫樂於好善
-《소서》〈본덕종도〉
이 글은 인간사에서 도덕을 실천하는 수덕(修德)과 선행을 좋아하는 호선(好善)을 우선으로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도 바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선조 임금은 일찍이 이순신의 학문은 황석공에게 전수받은 것이라고 극찬한 적이 있었다. 황석공의 이론이야 말로 천하를 경영할만한 큰 원리였는데, 이순신이 이를 본받았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周)나라 초기 정치가 강태공, 촉한(蜀漢)의 정치가 제갈량, 당(唐)나라 병법가 이정(李靖) 같은 전략가들은 전쟁 중에도 먼저 인의(仁義)를 베풀어 민정을 살피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에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먼저 구제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몸소 이를 실천하였다.
신(臣)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획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齊)나라의 거(莒), 즉묵(卽墨)과 같은 형세인데, 현재는 온몸에 고질병이 있는 자가 병든 다리 하나만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 임진년 8월 28일 이후 기록,《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
호남은 중국 전국시대 때 제(齊)나라의 거(莒)와 즉묵(卽墨) 땅과 같은 조선의 요충지이므로, 이곳의 백성을 먼저 구제하고 이곳을 사수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를 통솔하는 지휘관이면서 백성을 돌볼 줄 아는 목민관으로서의 책임도 다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전쟁에는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 풍부한 물자가 중요하다. 하지만 국가의 초석이 되는 백성들에 대한 남다른 애민정신, 즉 도덕 정신이 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손무는 《손자병법》에서 “천리를 출발하여 원정하는 데 하루에 천금을 소비해야 1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송대의 병가 장예(張預)는 “군사가 지치고 재정이 다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천금의 재정보다 화합 단결하는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는 경우 승리한다(上下同欲者勝)”고 말하였다.
현대사회에서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지라도 정신적인 결핍마저 물질이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도덕 정신만은 화합과 단결력을 이끌어 내어 물질적인 결핍과 한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올바른 경영과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중시되는 인간사의 진리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네 아들을 모두 현달하게 키운 학자 위현(韋賢)이 “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고 한 것은 역사 물질보다 도덕적 가치가 훨씬 중함을 깨달았던 것이다.《한서》〈위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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