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420년 봉인(封印)된 화두(話頭) 허응(虛應).무염(無染)의 비밀을 푼다.

韓.日 간 오로지 백성(百姓)의 나라를 꿈꾸며 민중(民衆)의 스승으로 한류문화의 원조(元祖)

임인식 시민기자 승인 2024.06.18 16:55 의견 2


莫道廟堂三老在(막도묘당삼로재) 묘당(조정)에 세(삼) 정승이 있다 말하지 마소安危都付一僧歸(안위도부일승귀) 나라(조선)의 안위는 한 승려가 돌아옴에 달렸노라.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문화에 대한 시각도 62년만에 대전환를 이루는 시점에 임진왜란(1592년) 이후 조선의 문화(文化)와 일본의 문화를 탐적사(探賊使) 임무로 선조(宣祖) 임금의 명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 최고 실력자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이에야스) 과 협상을 하며 포로쇄환과 평화수교를 맺은 사명대사(1544~1610)가 도일(渡日)후 남긴 유묵(遺墨)의 의미는 오로지 백성(愛民 불교. 관세음보살) 사랑 이었다.


난세(亂世)에는 영웅(英雄)이 난다고 한다.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육지에는 사명당(四溟堂, 四溟大師 1544~1610)은 단연 임진난과 정유재란등 영웅중에 영웅이다.

당시는 숭유억불(崇儒抑佛)시기로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속에 승려의 신분으로 민중(民衆)에서 민중(民衆)으로 구전으로 설파되어 도술을 부렸던 묘승(妙僧)이나 전설속에 유명한 스님으로 알려진 사명대사의 진면목(眞面目)이 국제문화재전략센터(이사장 박동석)과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회장 최호운), 사명성사 호국성지 밀양표충사(주지 진각스님)가 팔걷고 나서 “사명대사 일본 외교길 문화교류 탐방”단 구성으로 韓.日 간 오로지 백성(百姓)의 나라를 꿈꾸며 민중(民衆)의 스승으로 한류문화의 원조(元祖)를 개척한 420여년전의 봉인(封印)된 사명대사의 친필 유묵의 비밀을 밝힌다.


“천리마를 쫓으려면 천리마 종류”가 되어야 하듯 사명대사를 연구하려면 유교(儒敎), 불교(禪.敎), 시대적 상황과 시문(詩文), 한문 (漢文), 무예등 승과(僧科)에 장원급제하고 선(禪) 수행의 면모를 갖춘 선승(禪僧)의 경지에서 들여다 봐야함에도 장님 코끼리 다리만 만진격으로 일본에 소장된 친필유묵(親筆遺墨)에 담긴 의미(意味)는 ‘백제금동대향로’처럼 묻혀있던 역사문화에 목마른 자에게는 감로수(甘露水)가 될 것이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스승 서산대사의 뜻을 받들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의승병을 이끌고 왜적에 분연히 맞섰고, 특히 임란·정유재란 후 1604년 조정(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탐적사의 임무로 도일(度日)해 이듬해 3월 15일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德川家康))와 담판을 벌여 조·일(朝.日)간 포로쇄환과 국교 정상화의 외교사적 전무후무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사명대사의 위대한 외교력으로 조·일간 ‘침략과 저항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1607년부터 선린우호의 상징인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처음부터 3회까지는 회답 겸 쇄환사)를 1811년까지 12회 걸쳐 일본에 파견해 260여 년간 동아시아 평화를 지속하게 한 것은 사명대사의 위대한 외교력의 최고의 업적 이지만 억불정책(抑佛政策)하에 승려가 돋보이기는 당시 정세로는 녹녹하지 않았다.


억불정책으로 오로지 민중에서 구전되어 오던 사명대사의 충의(忠義)는 영조(英祖)임금때 내려와서 표충사(表忠祠)로 사액(賜額)되고 1839년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오면서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지금까지 유림(儒林)들이 춘추(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게 된다.

5년전 2019년 시절인연(時節因緣)에 의해 사명대사가 임란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도일(渡日), 일본 현지의 고승들과 필담을 나누며 써 주거나 지어준 유묵 원본 5점이 41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어 국민들과 불교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왔으나 시대가 너무 멀어 집중 조명되지는 못하고 기록만 남겼다.

유(儒)·불(佛)관을 견지한 사명대사의 행서와 초서가 섞인 필적 ‘행초체’는 일반인들의 해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는 고승(高僧)들의 선문답(禪門答)에 불과 했으며 그 깊이의 섬광이 비추는 핵심은 발견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일본 교토(京都)) 흥성사(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사명대사 유묵 5점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 전시되고 필사본 2점이 밀양 표충사에 기증된 것이다.

일본 사찰이 소장하고 있는 사명대사 유묵이 국내에서 경위야 어쨌든 최초로 공개된 역사는 베일에 가려진채 도일 414년 만에 처음 있던 일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속에 경남 밀양에 있는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홍제중학교(교장 김정우)에서 코로나19가 풀리자 항일승려 사명대사 발자취 찾아 일본 현장체험학습 ‘홍제원정대’를 구성하여 2023년 11월 14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교토 오사카성, 교토 본법사, 고쇼지, 후시미성등 사명대사의 탐적사 길을 따라 체험 학습에 나선 것이다.

김정우 교장을 비롯하여 흥성사(興聖寺)주지 모치즈키 고사이스님(望月宏濟) 와 인연이 깊은 (前)사명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임인식(풍천임씨중앙종친회 부회장, 현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 연합회 부회장)씨, 진각 밀양 표충사 주지스님, 김선원 서예가(前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함께 역사문화를 설명하고 2023년 11월 일본 흥성사(興聖寺)에서 한일불교문화교류(韓日佛敎文化交流)의 협약을 하고 KBS 진품명품 前 감정위원 김선원(서예가) 선생이 증명하여 ‘결금석난맹영(結金石蘭盟永)’을 작성한 것이 국내에 알려졌다.

이후 많은 언론의 보도로 국민속에 회자되며 불교계와 학계, 언론등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왔으며 (사)국제문화재전략센터(이사장 박동석)의 노력으로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와 불교 조계종 밀양 표충사,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풍천임씨 종친회, 김선원 서예가등 사명대사 일본외교길 문화교류 탐방단이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하게된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는 ‘사명’(四溟) 대신 ‘송운’(松雲)을 썼다.

전쟁 전(前) 평화시에는 민중으로부터 존경 받는 선승(禪僧)으로, 전쟁 중엔 구국(救國)의 일념의 장수로, 전쟁 후엔 탁월한 외교관(外交官)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그의 위대한 외교력의 역사로 동아시아는 260여 년간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라 정세와는 다르게 평가 되겠지만 역사(歷史)의 예언인가? 도통인가?

후대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1681~1752)선생은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입에 이름이 전해 내려오며 필적이 보물처럼 간직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사명대사뿐일 것”이라고 전했다.

사명대사가 도일 전년에 일본에서는 흥성사(興聖寺)는 창건(創建)하였다. 그리고 대사(大師)가 그 절에 머문 일이 있었다. 그때에 주지 원이(圓耳 엔니)는 자기가 깨친 선리(禪理 禪法)를 진술하자 사명대사는 그것을 인가(印可) 증명(證明)하고 허응(虛應)이라는 자(字 도호)와 ‘무염(無染)’이라는 법호를 지어주었다. 그것은 곧 사명대사의 인가(印可)를 받아 그 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법손(法孫)이 그 절을 이어오면서 사명대사 의 필적(遺墨)도 잘 보관하여 현재까지 내려 왔던 것이다. 그런 사실(史實)이 흥성사연기(興聖寺緣起)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사찰(寺刹)은 전란으로 파괘되고 불심(佛心)은 억불(抑佛)로 암흑일 때 허응(虛應) 이란 도호(道號)는(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15~1565) 꺼져간 조선의 불맥(佛脈)을 증흥조(中興祖) 허응(虛應)으로 맥을 잇게 하고 법호(法號)의 무염(無染)은 통일신라 선종(禪宗)의 대가람 민중의 9산선문(九山禪門)의 임진왜란으로 소실(消失)된 선맥(禪脈)을 일본(日本)에서 전(傳)하게 한 420년 사명대사를 어떻게 이해할까?

억불정책이 극에 달한 조선후기에 승려를 표충사(表忠祠) 사액과 유림들의 춘추향사와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선암사,대흥사등 대한민국 세계유산에 등재된 7곳의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산지승원과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된 ‘합천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와 전국 50여졈의 영정중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된 ‘대구 동화사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의 본인과 부모, 조부모, 증조모 까지 내려진 교지의 국가유산과 밀양 표충사에 보관중인 선조임금이 하사했다는 ‘사명대사 금란가사와 장삼’등 유품과 국가경사나 국난 징조때면 땀을 흘린다는 “밀양표충비”등 평양성탈환의 존재감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가유산의 결정체이다.


어릴적 위인전에서 보았던 희미한 반추의 기억속에 사명대사가 한.일 관계의 420년 전(前) 남긴 사명대사의 유묵의 무게는 우리에게 다가온 백성 사랑의 기독교의 예수님, 불교의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관세음보살로 추존되는 역사 문화속에 진정한 한류문화의 원조를 국가유산청에서 문화유산으로 새로운 국민통합과 전쟁이 난무하는 국제적 흐름과 세계질서속에 미래 번영의 방향성을 국민과 함께 관심을 기울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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