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가 없던 진도 굴포마을에 380여년 전 첫 간척지를 만든 '윤선도'

- 1232년 고려조정이 몽골의 침략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간척이 시작되었다
- 진도 굴포마을 주민들을 위해 윤선도선생이 간척사업 추진으로 굶주린 해결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5.07 13:10 | 최종 수정 2024.05.15 18:31 의견 0

380여년 전 조선 시대에 고산 윤선도가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만에 간척을 위해 쌓은 제방인 '고산둑'의 모습(사진제공 진도 전남관광해설사 장재호)

진도(珍島) 굴포마을은 380여년 전 조선 시대에 윤선도(尹善道)의 할아버지인 윤의중(尹毅中) 때부터 간척을 시작하여 윤선도(尹善道)가 완성한 농지이다. 당시 굴포마을은 농지가 부족하여 주민들은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윤선도는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간척 사업을 추진했다. 진도 굴포마을은 섬으로 이루어진 진도군에 위치하며, 현재 농지의 40%가 1970년대 까지 간척지사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380여년 전에는 농토가 많지 않았던 곳이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굴포마을 주민들과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가 함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첫 간척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민간 간척 1호인 고산둑 전경과 설명 표지판(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 우리나라의 간척

간척사업의 기원은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 수요도 늘어났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경지가 필요해져 간척이 진행되었다.

우라나라의 간척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보인다. 1232년(고종19년) 고려조정이 몽골의 침략에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인 간척이 시작되었다. 당시 몽골군을 피해 왕족ㆍ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이 강화도와 그 인근의 섬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인구증가와 경지면적의 부족으로 해안지역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확장했다. 1256년 고종 43년 몽골의 침략에 강화로 피신하였을 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방을 쌓았고 그 이후에도 가뭄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와 해적이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해안지역의 간척이 활성화될 수 없었다. 이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영농에 종사할수 있도록 둔전(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을 조성하였다.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해안 일대가 토지 확대를 위한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규모가 큰 간척사업의 경우는 대부분 국가에서 시행하였고, 하안(河岸, 강이나 내의 양쪽 언덕)과 도서지방의 소규모 간척인 경우에는 민간에서 개인 노비 등 사적 노동력을 동원하거나 공동으로 계를 조직하여 간척하기도 했다.

고산 윤선도선생의 존영(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



▶ 호남지방의 간척사업을 선도했던 해남윤씨가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조선 중기에는 민간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해남윤씨가는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안으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가 1640년(54세)에서 1660년(74세) 사이에 완도, 진도 등지에서 간척사업을 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정보(약 390,000평),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약 600,000평) 가량을 농토로 간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은 여러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간척사업은 공재 윤두서를 통해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는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당악문헌(棠岳文獻, 조선 후기 해남 윤씨 가문 인물의 행적과 기록을 모은 문헌)>의 공재공행장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어느해 심한 가뭄으로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백포만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만들어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화염)을 구워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산은 공재 윤두서의 외손으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공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은 1818년(순조18)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 등 간척에 관한 기술을 수록할 만큼 간척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의 이러한 간척에 대한 기술은 고산을 비롯한 외증조인 공재 윤두서의 간척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목민심서>의 일부를 보면 제방을 쌓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제방을 쌓는 방법은 반드시 기중기를 사용하여 큰 돌을 운반하여야 한다. 또 조수를 막는 한 대를 만들어 조수 물머리를 감쇄시켜야 한다는 기록도 있다. 수원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다산이 간척을 위한 방법에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적용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사업은 근대에 까지도 이어지는데 고산의 12대 후손인 윤정현(尹定鉉)도 1930년대 초반에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15만평을 간척 하여 그 일대가 지금도 이 집안의 소유로 되어 있다.

굴포만에 간척을 위해 쌓은 제방인 고산
둑과 굴포방조제 주변 전경(사진제공 진도 전남관광해설사 장재호)

▶ 진도 굴포리(珍島 屈浦里) 간척(干拓)

섬으로 이뤄진 전남 진도군은 농지의 40%가 간척지다. 섬 곳곳에 있는 간척지 대부분은 1970년대 갯벌에 제방을 쌓아 농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진도의첫 간척지는 380여년 전 조선시대에 개발됐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마을은 진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포구마을로 바닷가와 면하고 있지만 마을 앞으로는 꽤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1500년대 후반 윤선도의 할아버지인 윤의중(尹毅中, 1524~1590) 때부터 시작된 굴포만 간척사업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됐고 윤선도가 1640년대 후반쯤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간척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시조작가였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가 완성했다. 이곳에는 고산이 간척하기 위해 쌓았다는 제방 둑이 약 380여 미터가 남아 있는데 높이 3m, 길이 380m의 제방이 있는데 ‘고산 둑’ 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약 200정보(약 600,000평)가량을 간척하였다.

고산은 60세(1646년, 인조24년)때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1585~1657)와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진도에 잠시 머물면서 간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 굴포리에 머물면서 경주설씨(윤선도의 첩이고 38년 연하이면 1남2녀를 낳음)를 만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산이 이곳에 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전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때마다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새벽녘 사립문을 열고 나가 제방을 쌓는 곳을 보니 꿈에 보았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구렁이가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의 지형이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쌓은 결과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농토가 부족한 섬에서 이뤄진 간척으로 주민들은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굴포간척으로 농민들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에는 굴포간척지의 추수 기록을 담은 ‘굴포전답곡기(窟浦田畓穀記)’ 등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수년전 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다른 지역 당제와 달리 실존 인물이었던 고산 윤산도 선생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굴포당제를 매년 정월 대보름에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370여년 동안 지내 왔었다. 이곳에 있는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는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웠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남선, 백동, 신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

전남 진도군 굴포마을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사당인 '고산사'의 전경(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고산 윤선도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보길도에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빼어난 시조단가 작품을 쓴 조선중기의 학자로만 기억할 수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수백년 앞을 예견한 간척사업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많을 것이다.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의 130정보(약 390,000평)간척지와 진도의 굴포리 200정보(약 600,000평)간척지는 지금으로부터 380여년전 아무런 기계기구도 없는 원시적인 농기구와 주민들의 피땀으로 간척사업을 일구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집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였을 것이다. 지금으로 ‘새만금간척사업’에 못지 않은 대역사가 아니였겠는가?하고 생각해 본다.

고산 윤선도선생의 사당 주변 경관과 시비, 사적비의 모습(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 참고문헌

1. 정윤섭, [윤선도의 간척유거지에 선 배중손], 오마이뉴스, 2007.

2. 메그, [고산 선생의 무궁무진한 재력의 원천은 ?], 네이버 카페 서바이벌리스트, 2021.

3. 강현석, [진도 굴포마을 350년째 윤선도 감사제], 경향신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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