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臨淸閣)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이 깃든 곳이다. 500년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단순한 한옥을 넘어,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와 뜨거운 애국심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단순히 임청각의 역사를 탐방하는 것을 넘어, 석주(石州)선생의 삶과 업적을 통해 진정한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고,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의 초청으로 안동의 다양한 국가유산들을 둘러보는 뜻깊은 역사탐방의 소중한 시간을 갖고자 마련하였다.
▶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종 목 |
보물 |
명 칭 |
안동 임청각 |
지정일 |
1963.01.21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李洺)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858~1932)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돌멩이를 마주 놓아 겹으로 쌓은 돌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칸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李增)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때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우리나라 상고사의 귀중한 자료인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하고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杏村 李嵓, 1297~1364)은 조선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용헌 이원(容軒 李原)의 조부가 된다. 용헌 이원(容軒 李原)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현손인 경상감사 청호 이희(淸湖 李暿)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된것 같다. 임청각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 등동고이서소(登東皐而舒嘯)하고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로다'라는 시구에서 ‘임청(臨淸)'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50여 칸만 남았다.
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라고 한다. 석주 선생과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洛坡 柳厚祚)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 임청각(臨淸閣)은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이며 산실(產室)이다
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선생은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을 도왔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망명 직전에는 "공자와 맹자는 시렁(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선반처럼 만든 것)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 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 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 구한말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으뜸 벼슬)으로 활약했고, 1925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
▶ 고성이씨 탑동파(固城李氏 塔洞派)
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李復元)은 자식을 5남 3녀를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 탑동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 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李後植, 1653~1714)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 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은 임청각 역사탐방을 통해 석주 이상룡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기아국가유산지킴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임청각의 역사탐방은 단순한 관광이나 여가 활동을 넘어,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 참고문현
1. 문정화, [안동 임청각 독립운동 명문가의 산실], 대구일보, 2019.
2. 풀향, [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4) -고성 이씨], 네이버 블로그 '이화에 월백하고', 2021.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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