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천은 광주광역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총길이는 약 19.85km(국가하천12.2km, 지방하천7.65km )에 달한다. 광주천에는 동구 용연동의 제2수원지 아래의 다리로부터 영산강과의 합류점인 치평동의 상무대교(제2순환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두 46여개의 다양한 다리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다리들을 몇 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 석서정(石犀亭)
광주공원 앞, 광주교와 광주대교 사이 지점에 있는 정자이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정자이다.
석서정(石犀亭)은 고려 우왕때 광주목사 김상(金賞, ?~1389)이 광주천의 물길을 바로잡아 주민들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지금의 금교 근처『양파정 앞(楊波亭 前) 』에 석측을 쌓고 섬을 만들어 그위에 정자를 짓고 석서정(石犀亭)이라 하고, 양쪽으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건너 다녔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고적조(古蹟條)와『광주읍지(光州邑誌)』 고적조에 기록된 석서정(石犀亭)은 돌물소[石犀]의 정자라는 뜻으로 곧 수재를 막기 위한 취지에서 정자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물소가 능히 물을 제압하여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고대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 ~1396)의 「석서정기문(石犀亭記文)」이 전한다. “석서정은 매년 여름에 장마가 들면 급류가 사납게 쏠려 잦은 범람으로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가서 광주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광주천의 수세를 줄이기 위해 분수원(分水院)을 두어 물의 형세를 약하게 하려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 ~1396)이 기문을 지은 첫 머리에 광주를 빛의 고을이라고 ‘석서정기(石犀亭記)’를 지으니 광주가 빛고을이라는 별칭을 갖게되는 어원의 시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석서정(石犀亭)건립 이후 대략 100년이 지난 조선 성종 무렵에는 이미 퇴락(頹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의 위치는 아니지만 2006년 광주공원 대교 옆에 정자를 세우고, 옛 선인들의 광주 사랑과 치산치수(治山治水, 산과 물을 다스려 재해를 막는 일) 정신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원, 옛 ‘석서정(石犀亭)’의 현판을 다시 걸고 시민들의 쉼터가 됐다. 그러나 지금 지어진 ‘석서정(石犀亭)’의 위치가 현재의 금교 근처『양파정 앞(楊波亭 前) 』가 아닌 광주공원 광주교(光州橋) 옆에 있는 것이 많이 아쉬운 점이다.
▶ 노지(奴只, 습지 벌판)다리
100여년 전만해도 광주천에 규모 있는 것으로 거의 유일한 다리는‘노지다리’였다. 이 다리는 대략 ‘사동 최부잣집’앞 일대에 있었다. 그런데 현재 최부잣집에서 광주천은 약 100m이상 떨어져 있어 이곳에 다리가 있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1928년 광주천 직강화공사 이전에는 광주천의 폭이 가장 길었던 곳은 300m로 현재의 10배 이상이었던 것이다.
광주천에 있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진 흙다리이다. ‘노지(奴只)’라는 명칭은 광주를 부르던 옛 이름들 가운데 하나로, 오랫동안 광주천에 걸려있던 유일한 다리였던 만큼 광주의 별칭을 갖다 붙여 탄생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의 백제 때 이름인 무진주(武珍州)의 다른 이름이다. 백제시대에 무진(武珍) 일명 노지(奴只)라 한 것은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란 옛 지명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동(未冬)은 습지를 뜻하고, 부리(夫里)는 '벌' 즉 벌판이라는 우리 옛말이다.
노지(奴只)다리는 1896년 9월 당시 광주의 전남관찰부로 업무보고를 하러왔던 지도군수 오횡묵(吳宖默, 조선후기 지도군수, 여수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면서 학자)이 남긴 기록『지도총쇄록(智島郡叢瑣錄)』에 운교(雲橋), 즉 구름다리라고 소개했던 다리이기도 하다. 노지다리는 1910년까지 남아 있다가 이후 광주천의 유로(물이 흐르는 길)가 사동에서 불로동 쪽으로 붙어 흐르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노지다리였던 자리가 택지로 변모하였다.
▶ 광주대교
광주광역시 서구 국도 제1호선에 설치된 다리로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및 동구 수기동과 서구 양동의 분기점에 자리한 광주천을 건널 수 있도록 건립된 다리이다. 1928년에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건설되었는데 현재는 이것보다 큰 다리가 많아 대교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당시에는 가장 넓고 튼튼한 다리였으므로 대교라는 이름이 붙기 충분했다. 또한 광주와 목포를 잇는 광목간도로의 일부이기도 했다. 원래는 위쪽의 광주교를 지나는 노선이었으나 광주대교가 지어지면서 변경되었다.
광주대교는 광주광역시의 관문을 지나갈 수 있는 통로인 만큼 '광주'라는 도시명을 따서 붙여진 다리명이다. 왕복 2차선의 교량으로 총 길이는 57m, 총 폭은 15m, 유효 폭 넓이는 9.1m, 높이는 4.8m이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광역시의 관문역할은 충장로3가에 자리한 북문이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 충장로의 시가지가 4~5가로 확장되면서 지금 남구 사직동과, 동구 충장동, 서구 양동 지역과 광주천 좌안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송정리와 나주방면을 잇는 도로 교차점
방면을 잇는 도로 교차점(현재 월산사거리)과도 여전히 연계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너무 북쪽인 것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광주교 인근에 새로운 다리를 가설하는 것이었다. 또한 192
0년대에 광주역(구광주역, 현재의 동부소방서 근처)이 준공 및 개통(1922년)되면서 새로운 도시 공간의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광주역 정면을 잇는 도로가 필요하였고, 그 도로를 이어 광주천을 건널 수 있는 새로운 교량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도로를 조성하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때문에 1928년 광주대교가 먼저 가설되고, 광주역의 정문을 잇는 도로(현재의 구성로)는 1921년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한참 후인1963년이 되어서야 조성될 수 있었다. 이로써 광주대교는 광주역(구광주역, 현재의 동부소방서 근처) 정문을 잇는 교량으로 광주의 관문을 상징하는 교량이 되었다.
광주대교는 1928년 최초 콘크리트로 준공되었고, 준공 초기에는 인근에 자리한 광주교와의 구분을 위해 '신광주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28년 완공 당시 길이는 60여m이었다. 완공 후 여러 번의 재가설이 진행되었고 1996년 공식적인 재가설 후 여러 번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광주천의 다리들은 광주 시민들의 삶과 함께해 온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리의 유지·보수와 함께, 다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노력도 필요하다. 광주천의 다리들은 광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주는 소중한 자산으로, 앞으로도 그 가치를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참고문헌
1. 박선홍, [광주 1백년 3], 광주문화재, 2015.
2. 조광철, [광주 갈피갈피, 광주천의 이름들], 광주드림, 2022.
3. 이수경·백현명, [디지털광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4. 강기정,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광주광역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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