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벌 호랑이라 불린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은 1878년 7월 22일 경상도 안동군에서 김계락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만주로 망명해서는 이름을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김동삼이 태어난 마을은 의성 김씨의 집성촌인 안동 내앞마을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로 그 학맥을 이은 김성일(金誠一)은 본관이 의성인 아버지 청계 김진(靑溪 金璡)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은 이래 쭉 이곳에서 번성해 왔다. 김동삼은 김진의 둘째 아들인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고, 스승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1827~1899)은 김성일의 11대 종손으로 영남 퇴계 학맥의 적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고 1895년에는 안동 의병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주도하고 의병 지도자가 되었다. 김동삼은 이런 스승에게 배우며 민족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김동삼은 20대 후반인 1905년 무렵 서울을 오가면서 신교육과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였다. 한국 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격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등과 함께 경북 안동에 근대식 중등교육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동에서는 이상룡 · 김대락 등을 중심으로 집단 망명을 준비하였고 사전 조사를 위해 김동삼과 김만식(김대락의 동생 김효락의 맏아들)은 만주를 다녀왔다. 서간도로 망명한 내앞마을 의성김씨 가문의 망명객은 모두 150여 명이었고 이 무렵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독립 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사람은 100여 가구에 약 1,000명에 이른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이상룡 ·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썼고, 경학사(耕學社)는 한국인들의 자치단체였다. 이상룡이 초대 사장이 되었고,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이동녕, 교무부장은 류인식이 맡았다.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 업무를 맡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 '농장주'가 아니라 독립군 군영의 최고 지휘자를 의미함)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김동삼은 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서로 협조하였고,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특히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일제가 ‘경신참변(1920년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한국인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동삼의 동생 김동만도 살해당하였다. 또 청산리전투에서 조카 김성로가 전사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 일은 김동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24년 김동삼은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길림 남쪽 영길현 신안둔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동삼은 늘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통합에 힘을 쏟았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2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에서 김동삼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장례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에 의해 치러졌다.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식을 진행한 뒤,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의 인물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동댐 보조광장에는 일송 김동삼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1999년 11월 4일 안동청년유도회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동 혁신 유림이었던 김동삼은 신식학교인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면서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다. 만주로 망명 후 백서농장에서 장주로 지내며 독립군들을 양성하려 했으며,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후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무관 학교들을 통합하고자 했으며,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에 군대를 보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데 큰 힘을 보탬으로 독립 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후손들은 현재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독립의 값어치와 그 희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 참고문현
1. 김달승, [항일의 땅 내앞 마을,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 네이버 기산인의 블로그, 2021.
2. 국립서울현충원, [7편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 ], 네이버 블로그 '기일' : 기억의 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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