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경루(喜慶樓)는 1451년(문종 원년)에 무진군수(茂珍郡守) 안철석(安哲石)이 옛 공북루 터에 지은 관영 누각이다. 광주목은 1430년(세종 12)에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복호되었는데,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완공되자 희경루(喜慶樓)로 명명하였다. 희경루(喜慶樓)는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충장로 광주우체국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이 일대가 중심상권이고 사유지가 대부분이어서 부득이 광주공원으로 터를 옮겨 전라도 정도 천년(2018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소실된 누각을 중건하기로 하고, 동국대에 소장 중인 보물 제1879호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를 바탕으로 2023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당시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희경루에 관련된 사건과 인물 그리고 조선 시대에 관료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던 희경루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희경루(喜慶樓)
필문 이선제(畢門 李先齊, 1389~1454) 등 광주 원로들의 간청으로 문종 원년(1451년)에 20여 년 만에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 마침 광주읍성에 새 누각이 준공되자, 함께 기뻐하고 서로 경축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희경루(喜慶樓)라 붙였다. 1451년 신숙주(申叔舟)와 1536년 심언경(沈彦慶)은 각각 [희경루기] 에서 "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父老咸集致慶).",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축했다(邑人咸喜相慶)"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두 기록은 광주 읍민들이 광주목 승격을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쁨의 누각이란 이름의 희경루(喜慶樓)는 1533년(중종28) 화재가 일어나 불타버린다. 그 후 [희경루기]를 남긴 신숙주의 후손인 광주목사 신한(申瀚)에 의해 재건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세기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신한(申瀚)에 의해 재건된 희경루는 한 폭의 그림으로 동국대 박물관에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로 남아있다. 이 그림은 명종 22년(1567) 광주목사 최응룡(崔應龍,1537~1592)이 1546년 함께 과거에 급제했던 동기생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고시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인 셈이다. 희경루와 주변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광주읍민들의 기쁨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과 누마루 집 형태로, 남원 광한루와 진주 촉석루에 버금가는 누정으로 추정된다.
▶ 희경루(喜慶樓)에 관련된 사건과 인물
광주목(光州牧)은 1430년(세종 12년)에 무진군(武珍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원년)에 복호되었는데,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완공되자 희경루(喜慶樓)로 명명하였다. 강등과 복호, 희경루 명명은 긴 사연이 있다. 세종 11년(1429년) 만호(萬戶, 종사품의 무관벼슬) 벼슬을 역임한 읍민 노흥준(盧興俊)이 목사 신보안(辛保安)을 구타했다. 신보안이 노흥준의 첩과 정을 통했기 때문에 노흥준에게 얻어터진 신보안은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세종 12년(1430년)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 신보안(辛保安)이 남의 애첩을 건드린 죄도 괘씸하지만, 현직 목사를 발로 걷어차 상해를 입힌 죄가 더 컸기 때문이다. 강상윤리를 해친 고을의 읍호 강등은 당시 법이었다. 1420년(세종 2년)에 제정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조선시대에 하급관리와 백성들이 상급관원,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법)’의 시행세칙으로 1429년(세종 11년)에 수교가 확정되는데 광주 강등이 첫 사례로 광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 처음으로 겪은 강등 조치였고 계수관(界首官)마저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내주고 말았다. 계수관(界首官)은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행정기구로서 도의 지시를 관할하는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하기도 하였다. 광주 읍호강등은 수교 반포 이래 처음 적용되어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광주가 사례로 언급되었다.
1451년(문종 원년) 여름에 순성군 이개(李?, 양녕대군 큰아들), 이조판서 권맹손(權孟孫), 인순부윤 김청(金聽), 예문 제학 이선제(李先齊) 등이 논의 하였고, 필문 이선제(畢門 李先齊)가 중심이 되어 노력한 끝에 6월 7일에 광주목으로 복호된다. 이때에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낙성되니 고을의 어른들이 광주목사로 부임한 안철석(安哲石)에게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함희상경(咸喜相慶)”의 뜻을 담아 “희경(喜慶)”으로 누의 이름을 지어 이 기쁨을 기념하고자 청하였다. 이에 따라 “희경루(喜慶樓)”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조선 시대에 관료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던 "희경루(喜慶樓)"
1571년 7월 28일 포폄(褒貶,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던 인사행정 제도)정사는 희경루(喜慶樓)에서, 7월 29일의 평가는 동헌(東軒)에서 이루어짐을 보았다. 이렇듯 희경루는 광주목의 관영 누각으로서 정무를 보는 관아 건물이다. 일반적인 민간 누정의 제영풍류(題詠風流)와는 구분되는 기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영 건조물의 외형으로서만 아니라, 그 공간과 관련된 역사 문화 관련 사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571년(선조 4) 7월 28일 당시는 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병사(兵使), 좌수사(左水使), 우수사(右水使)가 모여 수령(守令)과, 첨사(僉事), 만호(萬戶)에 대한 포폄을 논의하는 정사(政事)내용이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 기록이다. 유희춘은 1571년 2월 4일부터 10월 4일까지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네번의 순력(巡歷, 관할지역을 순회하던 일)을 하는데 세 번째의 순력 길이다
포폄(褒貶)은 관료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인사행정제도이다. '포(褒, 기릴포)' 는 승진과 포상, 폄(貶, 낮출폄)'은 강등과 파직을 뜻한다. 포폄의 시행과정은 평가와 동의, 보고의 3단계였고 보고 이후 해당 관리에게 성적을 공개하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각 자급(資級)마다 일정한 기간을 근무해야 한 급씩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를 사만승자(仕滿陞資)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과성적과 포폄성적이 좋아야 했다. 경관(京官)과 외관(外官)에 대한 포폄은 매년 6월과 12월에 한다. 경관(京官)은 해당관청의 당상관이, 외관(外官)은 관찰사와 병사와 수사가 상의해 포폄을 한다. 다만, 제주 삼읍(제주, 대정, 정의) 등의 세 고을은 제주목사가 등제를 매겨 관찰사에게 보고한다.
광주 희경루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광주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186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57년 만에 다시 복원된 희경루는 광주시민들의 휴식공간과 주변산책, 광주의 풍경을 감상하고 다양한 문화 행사와 전시회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뜻을 담은 그 이름처럼 광주시민들에게 기쁨과 경사를 선사하고, 광주를 대표하는 역사, 문화, 관광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 참고문헌
1.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2014.
2. 정인서, [희경루],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20.
3. 김희태,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하다 '희경루'], 광주드림, 2023.
4. 김덕진, [사이버광주읍성 희경루], 광주역사문화자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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