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역사
◾️마라톤의 기원은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의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마라톤 유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의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아테네 동북쪽에 위치한 마라톤 들판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데스(Militiades) 장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서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가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쉬지 않고 달려갔다. 페이디피데스는 장거리를 종주한 뒤 “우리가 승리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라고 외치고 죽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역사가 된다’지만, 이 내용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전투는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간에 벌어진 결정적 전투로, 전력상 아테네가 열세였다고 한다. 아테네의 힘만으로는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페이디피데스를 전령으로 파견하여, 숙적인 스파르타에 참전을 요청했다. 즉, 페이디피데스가 당시에 가장 잘 달리는 자임에는 분명했지만, 승전보가 아닌 원군을 청하기 위해 달렸다고 전한다.
◾️근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
마라톤 경기는 페이디피데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인 그리스 아테네대회에서부터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페이디피데스가 달린 거리는 뒷날 실측해 보니 36.75㎞였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의 형편에 따라 마라톤 거리가 40㎞를 전후로 하여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 때의 코스인 42.195㎞를 정식거리로 채택하게 되었다.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마라톤 경기의 거리를 일정하게 통일하자는 의견이 나왔
다. 남성들만의 경기였던 마라톤이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여성마라톤이 정식 채택되었다. 이처럼 마라톤경주는 근대올림픽과 함께 성장, 발전해 왔고, 현재는 보스톤·뉴욕·동경·후쿠오카·런던·북경·몬트리올·시드니·서울 등의 국제마라톤대회가 실시되고,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및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마라톤 세계 신기록(켈빈 킵툼 2시간 00분 34초)
마라톤 세계 신기록은 케냐 켈빈 킵툼(kelvin kiptum)은 2023년 10월에 시카고 마라톤에서 2시간 35초의 세계 기록을 꼈다. 그는 엘리우드 킵초게(Kipchoge)의 세계 기록을 35초나 단축시켰고, 마라톤 역사상 처음으로 2시간 1분 이내에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이 되었다. 마라톤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켈빈 킵툼(kelvin kiptum)이 2024년 2월 1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시간 1분 이내에 마라톤을 완주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 한국 마라톤의 역사
우리 나라에서 실시된 마라톤경기의 효시는 1919년 발족된 조선체육협회가 1920년 용산 신연병장에서 개최한 경성(京城, 현 서울)일주 마라톤(25㎞)이다. 이 경기에서 최홍석(崔洪錫)이 2시간 11분 27초로 우승하였다. 한국 최초의 마라톤 공식기록은 '마봉옥'선수가 1927년 조선신궁 체육대회에서 3시간 29분 37초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 뒤 1929년에는 일본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주최 제5회 한성역전마라톤대회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출전하여 일본팀들을 물리치고 우승하였을 뿐 아니라 3연승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우승은 일제하의 우리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으로, 우연하게도 일제통치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도입된 마라톤이 민족의 설움을 달래는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한국인으로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 제10회 LA올림픽대회에서는 김은배가 2시간 37분 28초로 6위, 권태하(權泰夏)가 2시간 42분 52초로 9위에 입상함으로써 일제하의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에서도 마라톤은 계속 발전하여 세계제패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민족 영웅 손기정(孫基禎)'이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남승룡(南昇龍)이 2시간 31분 42초로 3위를 하여 한국 마라톤이 세계제패의 꿈을 실현하면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손기정의 승리는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 그 한을 가슴에 안고 달려, 만천하에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한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베를린대회 때의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사진을 ≪동아일보≫ 호외와 ≪조선일보≫ 사설에 게재하여 일본은 신문폐간과 체육단체의 해체 등으로 탄압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23일에는 조선육상연맹(朝鮮陸上聯盟)이 조직, 발족되었고, 1947년 4월 제51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최초로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서윤복(徐潤福)이 2시간 25분 39초로 우승하여 세계에 한국 마라톤의 건재함을 재인식시켜 주었다.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대회에서 황영조(黃永祚)는 2시간 13분 29초로 일본의 모리시다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하면서 메인스타디움에 1위로 골인하였다. 우리 나라는 손기정 이후 다시 한번 올림픽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되며 황영조는 ‘마라톤 영웅’이라는 호칭도 붙게 되었다.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에서는 이봉주(李鳳柱)가 남아프리카의 투가니와 라아스트까지 각축전을 벌이다 은메달을 획득하고, 1998년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 2위를 하면서 한국 최고기록을 수립했고, 다시 2년 만에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에서 2위로 2시간7분20초를 기록, 자신이 1998년 로테르담마라톤에서 세운 한국기록(2시간7분44초)을 24초나 단축한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2000년 이후 이봉주 선수를 뛰어넘는 선수가 등장하지 못한 것은 한국 마라톤계가 직면한 현실이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선수층 확대 , 해외 유수 선수들과의 교류 활성화, 마라톤 대중화, 과학적 훈련 및 시스템 개선 등의 노력을 통해 한국 마라톤이 다시 한번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길 희망해본다.
🔳 참고문헌
1. 박경철 '오디세이아, [장애딛고 일어선 마라토너], 광주일보, 2014.
2. 러너스인 서개, [마라톤의 기원과 역사], 네이버 블로그, 2016.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아마라톤대회], 한국화중앙연구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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