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이슈! 문화유산] <일성록>과 외금양계비

김희태 전문기자 승인 2024.06.25 08:53 의견 0

화성시 봉담읍과 정남면에 걸쳐 있는 태봉산에는 조선왕릉 관련 금표석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다. 외금양계비는 관항 1리에서 태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있는데, 지난 2004년에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후 비지정 문화유산으로 방치되었으나 지난해 8월 22일, 화성시의 새로운 향토유적(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관항 1리에서 태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세워진 외금양계비

외금양계비는 현륭원(顯隆園, 융릉)과 건릉(健陵)의 외금양에 포함된 태봉산의 수목 관리와 보호를 위한 정책이 확인되고 있어 조선 후기 산림 행정 자료의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외금양의 규모와 경계를 보여주는 유적이기에 의미가 있다. 화강암 재질의 외금양계비는 전면에 외금양계(外禁養界)가 새겨져 있을 뿐, 다른 명문은 없다. 외금양계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성록(日省錄)>을 함께 봐야 하는데, <일성록>은 쉽게 왕의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일성록>에는 외금양계비가 세워진 배경과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화성 외금양계비

외금양계비가 세워진 건 1798년(정조 22) 태봉산(台峯山) 아래 마을에 사는 신광린(申光隣)의 정소(呈訴, 소장, 민원)에서 시작된다. 당시 태봉산은 현륭원(顯隆園)의 외금양에 속했음에도 사실상 황폐화되어 있었다. 이에 정조는 홍범산의 사례를 언급하며, 태봉산의 숲이 울창해지려면 얼마 정도 걸릴지 물었는데, 이에 조심태는 2, 3년 정도 지나면 울창해질 것이라 답한 바 있다. 이런 와중에 신광린은 정소를 올려 백성들이 태봉산을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어 숲이 울창해지기 어렵다며 해법으로 마을에서 계(契)를 만들어 이를 관리하게 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관에서 징계와 처벌을 해서 실효성을 담보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신광린의 정소는 현륭원 영(顯隆園令) 서직수(徐直修)가 장용대장 조심태(趙心泰)에게 이야기하고, 조심태는 다시 정조에게 이를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해법을 제시한다.

“... 속히 본부(本府)로 하여금 산허리 아래에 금표와 표석을 새겨서 세우게 하고, 또 현륭원 영으로 하여금 지금 나무를 심는 때에 금석(禁石) 사이에 소나무와 잡목(雜木)을 줄지어 심어 여러 겹으로 둘러싸서 경계를 표지(標識)할 수 있도록 한다면 대소(大小)의 촌민이 아마도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할 바를 알 것이니 감히 멋대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략>...”
- <일성록> 1798년(정조 22) 2월 19일 중

이러한 조심태의 해법을 정조가 따르면서 외금양계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외금양계비가 세워진 지 25년 뒤인 1823년(순조 23) 2월 7일에 수원유수(水原留守) 이희갑(李羲甲)의 장계가 올라왔다. 장계의 주요 내용은 건릉과 현륭원의 외금양인 태봉산의 남쪽 기슭 아래 거주하는 신광린(申光隣)이 불법적으로 점거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현장을 확인한 이희갑은 신광린을 옥에 가둔 뒤 형추를 가하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관리‧감독을 소홀히 혐의로 건릉(健陵)의 전(前) 수릉관(守陵官)인 남연군과 건릉 영 유간(柳諫)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죄상을 알린 뒤 담당 관사로 하여금 임금에게 물어 처리할 것을 장계에 담았다. 이에 순조는 장계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해당 장계를 통해 외금양계비가 현재 남아 있는 1개가 아닌 여러 기가 세워졌음이 확인되는데,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이 직접 태봉에 가서 먼저 동쪽 기슭부터 간심(看審)하고 남쪽 표석(標石)에 이르렀다가 그대로 산등성이를 따라 북쪽 표석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남쪽 표석은 황곡리(黃谷里) 고개 앞에 있고 북쪽 표석은 노리(老里) 언덕 앞에 있으니 남쪽과 북쪽에 표석을 세운 것은 실로 황곡리의 고개와 노리의 언덕 두 곳의 경계를 정한 것입니다. <후략>...”
- <일성록> 1823년(순조 23) 2월 7일 중

위의 기록을 보면 남쪽과 북쪽에 표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태봉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표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각의 표석에 새겨진 명문이 일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장계가 올라온 지 3일 뒤인 2월 10일에 건릉(健陵)의 전(前) 수릉관(守陵官)인 남연군과 건릉 영 유간(柳諫)이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쓴 원정(原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원정 기록을 통해 남연군은 다음과 같이 표석을 봤다고 언급하고 있다.

“... 능원관이 산을 순찰할 때 함께 태봉(台峯)의 뒤쪽에 이르렀는데 과연 표석(標石)이 있고 「외금양하는 곳의 경계를 정한다.[外禁養定界]」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후략>...”
- <일성록> 1823년(순조 23) 2월 10일 중

위의 내용을 보면 표석의 전면에 외금양정계(外禁養定界)가 새겨졌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외금양계비의 명문인 외금양계(外禁養定)와는 일부 차이가 있다. 또한, 유간의 원정 기록에는 표석이 4개가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그 뒤로 9월께 수릉관 및 원관(園官)과 더불어 산을 순찰하여 태봉산 위에 이르자 4개의 석표가 우뚝하게 줄지어 서 있고 외금양하는 곳의 경계를 정한다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 <일성록> 1823년(순조 23) 2월 10일 중

이처럼 <일성록>을 통해 외금양계비의 가치와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 왕릉에 세워진 금표(禁標)의 실물 사례로는 유일하게 확인된 사례라는 점에서 희귀한 금석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정기적으로 외금양계비에 대한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외금양계비는 최초 발견 이후 비지정 문화유산으로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었지만, 국가유산지킴이의 적극적인 보호 활동과 연구, 그리고 민관협력을 통해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국가유산지킴이의 활동 방향성과 향후 외금양계비와 같은 유사 사례의 보호와 연구 활동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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