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진도에 가다. 2 (리아스식 해안에서 감자 모양이 된 진도)

- 진도 굴포 방조제는 단순한 토목 구조물이 아니라, 역사,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병기 선임기자 승인 2024.08.13 14:43 의견 0
분홍색의 옛 진도 모습과 흰색바탕의 현재 진도의 모습으로 간척률이 본도의 32%라고 한다. (그림 한병기)

과거의 진도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섬 자체가 둥그스름한 감자 모양이 아닌, 리아스식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들이 많이 분포된 모습이었다. 소포만은 훨씬 더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첨찰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바다와 더 가까운 곳에서 만나고, 마치 바닷물이 섬 곳곳으로 파고들어 섬이 물갈퀴를 펼친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의 진도는 변신술이라도 부린 듯 전혀 다른 감자의 모습이다. 진도 전역에서 벌어진 간척의 결과다. 리아스식 해안선의 갯벌도 대부분 매립되었는데, 간척 사업으로 본도 면적만 32%가 증가했고 대부분은 농경지다. 진도 쌀 농업사 자체가 간척사인 이유다.

위성으로 본 진도지도와 고상방조제(카카오맵 캡처)

▶ 진도의 간척사

진도에서 간척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 첫째는 쌀을 생산하기 위한 농토가 절실했다. 진도가 한때 옥주(沃州)라 불렸다는 이유로 땅이 비옥하고 먹을 것이 풍족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갯벌 간척 사업 이전에 진도의 농토는 아주 협소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진도는 대부분 목초지였다. 한때 진도 전역에 말을 놓아 키울 만큼 진도는 군마 목장으로 최적지였고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는 풍족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 후기 이전에 진도 땅은 척박한 데다 왜적의 잦은 침입으로 거주민들도 많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난의 역사에서 진도는 세 번이나 섬을 비웠고, 진도로 자진 이주해 온 사람들의 삶도 고달팠다. 그네들은 군인들과 그 가족, 유배된 관료들, 과도한 납세를 피해 입도한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이유로 공출을 탕감해 주기도 했다.

○ 둘째, 진도는 방조제 둑을 크게 높이지 않아도 태풍이나 해일 등의 피해를 덜 받는 자연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방조제 둑은 모래흙보다는 점질토와 자갈 등이 섞여 있어야 단단해져 무너지지 않는데, 농사짓기에는 어려운 진도의 토질이 둑을 쌓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해남 윤씨 일가가 대대로 진도와 해남, 완도에서 간척 사업을 벌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산방조제 둑길(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둑을 쌓아 현재에 이른 둑길이다.)

▶ 진도 간척 사업의 시대적 기록

- 고려 시대 : 1255년(고종 43), 국가 주도로 최초의 방조제 축조 기록이 등장하며 간척 사업의 시초다.

- 조선 시대 : 1660년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진도 굴포 갯벌을 막아 간척하며 민간인 최초의 방축 사업을 이끌었다.

- 일제강점기 : 1920년대 산미증식운동의 일환으로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근대적인 방조제 공사를 시작했다.

※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라는 목적을 세우고 시행한 정책이다. 1920년대 이후 총 3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1차 계획’은 1920~1925년에 시행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제2차 계획’은 1926~1934년에 시행된 ‘산미증식갱신계획(産米增殖更新計畵)’, ‘제3차 계획’은 1940~1945년에 시행된 ‘조선증미계획(朝鮮增米計畵)’이라고 한다. 이것을 총괄하여 일반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이라고 부른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식민지 조선의 농업생산 체제는 벼농사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쌀의 반출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한국인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또한, 대지주들은 쌀 생산을 통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토지 소유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 1970년대 이후 : 소포방조제를 시작으로 대규모 방조제 건설이 이루어지며 진도의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

일제강점기 산미증식으로 거둔 쌀이 쌓여 있는 군산항의 모습(네이버 캡처)

▶ 윤선도와 대한민국 최초의 굴포 방조제

전라남도 진도의 굴포 방조제는 단순한 농업용 방조제를 넘어선, 한국 간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방조제는 400여 년 전 조선 중기의 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보강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선도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축조 기술을 활용해, 바다를 농토로 바꾸는 대규모 간척 사업을 이끌었다.

굴포 방조제는 총 구역 면적 59헥타르, 간척 면적 51.2헥타르에 이르며, 높이 2.8m, 길이 294m에 달한다. 현재 18번 국도가 지나는 이 방조제는 윤선도가 처음 쌓은 원 둑을 1946년에 보강한 것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를 '윤고산 둑'이라 부르며, 방조제와 관련된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온다.

윤선도가 간척 사업을 진행하던 당시, 백동 앞 바닷물은 월출봉 아랫자락까지 들어와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지형은 '갈하입해(渴蝦入海)', 즉 목마른 새우가 물을 건널 수 없는 지역으로 불렸다. 윤선도는 이 갯벌을 농토로 바꾸기로 하고, 간척을 시작했지만, 그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썰물 때 쌓은 둑이 들물 때마다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윤선도의 지친 몸과 마음은 한계에 다다랐다.

윤고산 방조제 둑앞에 서있는 우리나라 간척지 1호 푯말

그러던 어느 날, 윤선도는 꿈에서 구렁이가 원둑을 향해 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깨어난 뒤, 그는 구렁이가 지나간 길에 서리가 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꿈에서 영감을 얻은 윤선도는 구렁이가 지나간 길을 따라 둑을 쌓기 시작했고, 기적적으로 둑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윤고산 둑은 뱀이 지나간 길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윤선도의 간척 공사는 진도 지역 주민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간척 작업 덕분에 많은 사람이 백동, 신동, 굴포, 남선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며, 이들은 간척을 도운 대가로 토지를 분배받았다. 해남 윤씨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굴포 간척 사업은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1524-1590)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윤선도가 열 살이었던 1596년, 굴포에서 소작료를 받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굴포리에서의 그의 거주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윤고산 둑은 윤의중 때부터 시작되어 윤선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방조제는 단순한 농업 인프라를 넘어, 지역의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윤선도의 간척 사업은 진도 지역의 농업과 경제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진도 주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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