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훼손한 덕수궁 선원전 터 임시 개방

전시공간으로 재탄생한 조선저축은행중역사택과 회화나무

by 김지연 시민기자 승인 2024.08.30 16:25 의견 0
일제가 선원전을 철거하거 그 터에 지은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1938년 완공했고 광복 후엔 주한미국대사관 임직원 숙소로 활용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 25일 덕수궁 선원전 권역(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외부 포함)을 공개했다. 선원전(璿源殿) 권역이란 ‘아름다운 옥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선대 왕의 어진 등을 모시는 궁궐 내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2030년 복원을 완료할 예정인 덕수궁 선원전 터 공사현장. 현재 발굴 공사가 끝나 공터를 개방했다.


1897년, 고종은 을미사변(1895)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가(아관파천, 1896년) 1년 후 공사관을 나오면서 경운궁(현 덕수궁)을 정궁으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경운궁은 원래 궁궐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정궁 경복궁이 불 타 없어지자 의주로 피난 다녀온 선조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임시 행궁으로 삼은 곳이었다. 광해군이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열고 한동안 궁궐로 쓰였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쫒겨나고 인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한동안 비어 있었다.

일제가 훼손하기 전 덕수궁 선원전, 흥덕전 권역

고종이 경운궁을 대한제국 황궁으로 지정한 뒤 궁궐 확장을 위해 많은 땅이 필요했다. 경운궁역의 확장은 크게 서측(중명전 영역), 남측(독일공사관), 북측(선원전) 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 돈덕전과 선원전이 자리한 북측 영역이었다.

발굴 공사 도중 출토된 선원전 기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선원전 주변은 일제에 의해 차례로 철거되고 땅도 팔려나가 1920년대 모두 철거됐다. 그 자리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미국공사관 부속건물이 들어섰다.

선원전 권역 영성문. 구한말 '영성문 대궐'이라고 불릴 만큼 덕수궁에서도 별개의 정체성을 지닌 공간이었다.


나라를 잃고 왕을 잃은 것도 모자라 궁궐까지 무차별 훼손되니 대한제국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여고 교정으로 사용되었고 2천년대에 미국이 대사관 신축을 추진하다 반대 여론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해당 토지를 교환했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내부


2011년 미국과의 토지 교환을 통해 확보한 선원전 영역을 덕수궁 복원정비 계획에 따라 2030년 초부터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 저축은행중역사택은 올해 8월 말까지 전시실로 꾸며 시범개방 하다가 곧 철거나 이전 복원을 추진 중이다.

중역사택 내부에서 이명호 작가의 회화나무 사진전을 볼 수 있다.

현재 전시장에는 선원전 터에 나홀로 서있는 회화나무를 소재로 한 특별전 <회화나무, 덕수궁…>(8월31일까지)을 선보이고 있다. 이명호 작가가 찍은 회화나무 사진과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 사진 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선원전 터 공사현장의 200년 묵은 회화나무


이 회화나무는 2004년 방화로 추정된 화재로 고사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정성껏 가꾼 보람이 있었는지 사진 속 이미지보다 더 무성하고 건강해 보였다. 죽다 살아난 나무처럼 일제에 의해 삭제된 대한제국의 기억도 조만간 복구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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