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 「만죽재·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예고

- 원형 보존된 고택과 현판·글씨 등 각종 생활유물이 지닌 우수한 역사·학술적 가치 인정

김용목 전문기자 승인 2024.10.07 16:46 의견 0
만죽재고택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의 집성촌으로서 유서 깊은 전통마을 「영주 무섬마을」 내 대표적 고택인 「만죽재고택」과 「해우당고택」을 오랜 세월을 거쳐 전해져 온 생활유물들과 함께 각각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만죽재 · 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榮州 晩竹齋 古宅 · 榮州 海愚堂 古宅 및 遺物 一括)」이라는 명칭으로 지정 예고하였다.

「만죽재고택」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이후인 1666년(현종 7), 반남박씨 박수(朴檖, 1641∼1729)가 무섬마을에 입향하면서 지은 고택으로, 입향조로부터 13대에 이르기까지 장손이 360년간 집터와 가옥을 온전히 지켜오며 배치와 평면, 주변 환경의 큰 변형 없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만죽재 본채


고택의 ‘ㅁ’자형의 평면 형태는 조선 중·후기 상류주택을 대표하는 유교적 종법질서의 표현 방법으로서 중요한 건축적 특징이며, 경북 북부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뜰집의 전형적 형태이다.

* 뜰집: 안채, 사랑채, 부속채 등이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는 주택

교육과 시문학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고택 뒤 섬계초당은 내성천과 무섬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8년 새롭게 복원되어 역사적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고택과 함께, 만죽재 현판과 원본글씨, 문방사우(종이·붓·먹·벼루), 여물통, 통나무계단 등 생활 민속유물이 잘 남아 있으며, 대표적인 유물인 역대 혼서지, 항일격문집, 규방가사집, 호구단자, 승경도 등을 포함해 「영주 만죽재 고택 및 유물 일괄(榮州 晩竹齋 古宅 및 遺物 一括)」로 지정예고 하였다.

* 혼서지(婚書紙): 전통혼례 때 신랑댁에서 신부댁에 보내는 혼인문서

* 항일격문(抗日格文)집: 입향조 8대손 박승훈이 필사한 을미사변 후 영남지역 항일운동의 격문집

* 규방가사집: 만죽재에 전승되는 내방가사로, 무섬마을에는 유교적인 덕목에 따라 살며 친지간의 우애, 삶의 희로애락 등을 표현하는 규방가사가 널리 알려져 있음.

* 승경도(陞卿圖): 말판에 '관직도표'를 그려놓고 윤목(주사위)을 던져 숫자에 따라 말을 놓아 가장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

「해우당고택」은 무섬마을의 선성김씨 입향조 김대(金臺, 1732∼1809)의 손자인 김영각(金永珏, 1809∼1876)이 1800년대 초반에 건립한 것으로 전하며, 그의 아들인 해우당 김낙풍(金樂灃, 1825∼1900)이 1877∼1879년에 고택을 중수(重修)한 이후로는 해체수리공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해우당 고택

* 김낙풍(金樂灃, 1825-1900): 흥선대원군의 친구로,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현재 사랑채에 걸려있는 해우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알려져 있음.

고택은 ‘ㅁ’자형 뜰집으로, 안방에서 태어나서 목방, 작은사랑, 큰사랑, 빈소방으로 옮겨가는 생애주기와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특히, 침수가 잦았던 무섬마을의 환경적인 결점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해 야외에 장독을 두지 않고 장독 보관을 위한 장고방을 따로 두고, 성주단지를 부엌이나 마루가 아닌 높은 다락에 둔 점, 높은 다락을 많이 만들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한 점 등은 자연환경을 잘 극복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택에는 출신 인물들의 학문적 깊이와 주변 인물과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다량의 고도서와 고문서 및 서화류, 탁본, 글씨 등의 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해우당과 대은정의 현판 및 글씨, 김낙풍이 작성한 과거답안지, 성주단지, 갓함 등 유물을 포함해 「영주 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榮州 海愚堂 古宅 및 遺物 一括)」로 지정예고 하였다.

해우당 사랑채

김용목 전문기자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