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
뛰어난 균형미와 절제미로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표현한 백제 고대불교문화의 상징
원영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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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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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땅 부여를 밝혀주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대표하는 중심유적이다. 정림사 또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화려한 백제문화를 연상케 하는 상징물로서 역사 속으로의 여행을 이끌어 주어 빛바랜 세월 속에서도 그 가치를 전하고 있다. 백제가 가장 번성하고 화려한 문화를 일으켰던 사비시대에 사비도성의 한가운데 자리한 기념비로서 백제라는 고대국가에서 불교가 차지한 위상, 불교가 하였던 역할, 불교와 고대국가와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기념비이다. 우리나라가 석탑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불교문화를 형성하여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 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여러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1창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형태를 재현하였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이다.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 이 정교한 지대석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받쳐 주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현재로 이어주어 고대국가에서 불교의 역할 다시 살아 숨쉬는 백제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다.
원영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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