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나주문화연구소(소장 유은식)와 국립나주박물관(관장 김상태)은 10월 18일에서 19일 이틀에 걸쳐 "마한사 연구현황과 쟁점"이라는 주제로 나주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올해 3회차를 맞는 이번 학술회의는 마한사 연구 활성화를 위한 공동학술연구로 기획되어, 매년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마한의 역사를 보다 뚜렷하게 구체화할 것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문헌사와 고고학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정재윤)과 한국고고학회(회장 이성주)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기조강연으로 임영진(마한연구원 이사장)이 '마한사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마한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하고 마한사의 학문적 쟁점으로 마한의 공간범위와 소멸시기 문제를 소개했다. 이어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 각 4인, 총 8편의 발표가 이틀에 걸쳐 이어졌다.
1일차인 18일에는 ▲ ‘마한의 기원과 실체에 관한 쟁점’(박대재, 고려대학교), ▲ ‘마한의 위치와 세력범위에 관한 논의의 전개’(전진국, 강원대학교)에 대해 현재까지 문헌사학에서의 논의와 쟁점을 정리하였다. 이어서, ‘서울·경기 지역’(박중국, 한신대학교), ‘호서지역’(장덕원, 서원문화유산연구소), ‘전북지역’(김은정,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는 마한 연구의 최신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소개했다.
2일차인 19일에는 ▲ 영산강유역권에서 확인된 옹관의 형식과 분포 변화 등을 통해 당시 백제의 지배전략을 추론해보는 ‘영산강유역권 마한의 성립과 전개’(오동선,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 문헌을 통해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던 기리영전투의 주체, 「진서(晉書)」 마한전을 중심으로 당시 마한의 중심세력과 발전단계를 알아보는 ‘대외관계 측면에서 본 3세기 마한사회 연구 현황과 쟁점’(김영심, 한국외국어대학교), ▲ 조선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시기별 학계의 다양한 논의 결과를 살펴보는 ‘백제의 마한 병합시기 연구현황과 쟁점’(김기섭,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까지 3개 발표가 진행되었다.
마지막 세션으로 권오영 서울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마한사와 마한문화를 바라보는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의 시각 차이를 좁히는 데 필요한 과제와 마한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다음은 이번 학술회의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들이다.
◇ '준왕남래설'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이 위만의 공격을 당해 남쪽으로 내려와 한(韓)의 땅으로 옮겨 다스렸다라는 소위 '준왕남래설'은 기원전 2세기 전후의 물질 문화 변화를 설명하는 마한 고고 연구의 획기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이번 학술회의에 발표를 맡은 문헌사학자들은 '준왕남래설'은 초기 「사기」, 「한서」 단계에는 보이지 않다가 점점 후대의 문헌으로 갈수록 살이 붙어가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적하며, '준왕남래설'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위만조선 멸망 전후로 많은 유이민이 삼한지역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데 주의를 환기했다. 한편, '준왕남래설'이 만들어진 계기에 대해서는 3세기 초 대방군 설치로 보는 박대재 교수의 의견이 있었다.
◇ '마한'의 시공간적 범위
'마한'이라는 명칭은 3세기대 중국측 사료인 「삼국지」 동이전에서 먼저 쓰이기 시작했다. 문헌사료에서는 그 존재가 이르면 3세기 말, 늦으면 4세기까지만 확인되고 5세기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중에는 '도읍이 목지국(目支國)'이라느니 '진왕(辰王)'이 있었다느니 해석이 모호한 표현들이 있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학술적 문제가 되고 있다.
토론에서 정동준 교수는 마한이라는 것은 중국측에서 기록함으로써 생겨난 구분이므로 그렇게 기록되었을 때에는 나름의 실체가 있었을 것임을 언급했다. 따라서 사료에 따라서 '마한'이 가리키는 실체가 달라질 수 있고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은 문헌사 연구자들이 발표를 통해 지적한 대로다. 고고학계 참가자들도 마한의 시작을 중국화폐나 한 군현 등 외래 문화의 영향 관계 속에서 찾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마한 54개 국의 이름을 모두 나열하고 있는데, 이를 한반도 여러 지역에 위치짓는 것이 그동안 마한사의 큰 흐름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 50여 개 국이 마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의견이 모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서」 장화열전에 언급된 '역대로 교섭하지 않은 20여 국의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전남 지역으로 위치지어지고 있는데 「삼국지」에는 확인되지 않으며, 토론의 윤용구 경북대 교수는 "현재까지 마한 50여 개국에 청주나 충주가 비정된 바는 없는데, 고고학적 유물 현황으로 보아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왜인전이나 서역전 등의 사례로 볼 때,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의 소국들은 중국과 교류했던 대상들만 적었으므로,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백제와의 고고학적 관계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마한은 4세기 중엽에 백제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은 6세기까지도 영산강 유역에는 백제의 영향을 받지 않은 특유의 옹관 고분 문화를 유지한 세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 백제의 마한 통합을 두고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어 왔다. 고고학계에서는 '마한'으로 규정할 만한 고고학적 동질성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서울-경기 지역에 대한 발표를 한 박중국 박사는 이 지역의 고고 문화는 매우 다양하여 단일한 계통으로 정리하기 곤란함을 거론하며 "물질문화의 유사성이 사회통합이나 복속의 정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며, 역으로 물질문화의 다양성이 지역의 자율성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해 좌장을 맡은 권오영 교수는 백제 고이왕이나 근초고왕 때 영역 확장이 되었다고 해서 백제의 특징이 마한지역으로 퍼져 나간 고고학적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외부의 물질문화가 백제로 들어와서 공존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의견을 제시했다.
김기섭 박사는 율령제가 작동할 때 무덤의 규모나 양식도 제한이 되는 것인데 과연 3~4세기에 백제권에서 그런 여건이 되었을까 의심된다며, 백제는 신라와는 달리 정복지에 규제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입장을 냈다.
학술회의를 마치며 이성주 한국고고학회 회장은 "마한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양한 것의 집합체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고, 이어 정재윤 고대사학회 회장은 "이번 학술회의가 신미제국, 목지국, 진왕, 백제의 지배방식 등 다음 학술회의에서 논의할 단서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립나주문화연구소는 이번 학술회의의 발표와 토론의 내용을 학술총서로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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