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榮山浦) 선창(船倉)
영산강(榮山江)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주,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까지 135km를 흐른 뒤 바다에 이른다. 영산강이 품은 영산포는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 때 진(鎭)이 설치돼 있었으며 1363년 (공민왕 12년) 당시 조정은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영산현(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을 영산강 하류의 남포(南浦), 즉 지금의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키고 흑산도 인근 전체를 비워두는 쇠환정책((刷還政策, 공도정책)을 취했다. 이때 이주해 온 흑산도 주민들을 따라 홍어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으며 현재 영상포(榮山浦)란 지명 이름도 영산현 사람들이 이주해 살면서 붙인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세곡을 보관하던 영산창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조선 전기 전국 9조창 중 하나로서, 전라도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양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에 영산창이 폐쇄되고 이후 영산창(榮山倉)의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法聖浦倉)에 통합되었다. 영산창의 폐쇄 이유는 육상 운송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더라도, 칠산(七山) 바다와 같은 험난한 해로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해난사고로 인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영산포에 배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든 것은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였고, 이때부터 일인들도 이민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영산동과 이창동 등지에 대규모 개발을 실시하여 ‘홈마찌’로 통용하던 본정통(本町通)을 만들고 헌병분견대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인을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영산포구 선창을 비롯한 현재의 영산포 모습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영산포 선창은 해방 후에도 20, 30톤급의 배들이 물때를 맞춰 오르내리며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목포로부터 흑산도 홍어와 서남해안의 풍부한 젓갈, 소금, 생선, 건어물 등이 뱃길을 통해 들어오는 집산지가 되었다. 특히 1972년 시작된 영산강 유역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상류에 댐이 하나씩 생기면서 유량이 줄어 배가 다닐 수 없었다. 1976년엔 영산강 하구언 건설을 위한 둑막이 공사가 시작되면서 뱃길이 아예 끊겼다. 과거에는 서해안에서 잡은 홍어가 모두 이곳에 모였기 때문에 홍어가 삭으며 풍기는 냄새가 거리를 진동했다고 하는데, 그런 과거의 휘황찬란했던 영산포구는 불빛이 꺼져서 그때의 영광은 찾을 수 없지만, 지금도 영산포에는 홍어를 판매하는 식당들과 홍어집들이 여러 곳 남아 있는데, 많은 홍어집은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흑산 홍어의 유명세를 가지고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산포(榮山浦) 영산교(개폐식 목교)
영산교(榮山橋)는 나주와 영산포를 연결하는 다리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다리이다. 등대 옆에는 1930년대에 세운 ‘영산구교’라 부르는 다리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전까지는 나무다리였으며 지금도 나무 기둥이 물속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영산구교가 만들어지기 이전인 1914년 이곳에는 배가 오면 다리를 들어 올려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개폐식 목교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14년 호남선 철도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이 다리는 영암, 강진, 장흥, 해남, 완도 등의 지역과 나주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이 되어 영산포 지역 상권의 번영을 가져왔다.
개폐식 다리는 신의주와 부산 영도다리 두 곳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부산 영도다리는 현인 선생의 노래인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1932년에 착공된 이 다리는 2년의 공사 끝에 1934년 개통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생긴 ‘들린 다리’를 구경하겠다는 사람들이 부산은 물론 주변 도시에서부터 몰려와 당시 부산 인구가 14만 명이던 시절 준공식에 자그마치 8만이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부산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서울 사람은 창경원(昌慶苑)에 코끼리 보러 가고 경상도 사람은 부산에 영도다리 보러 간다는 공식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영산포의 개폐식 다리는 지리학자 김경수 씨가 박사학위 논문 ‘영산강 유역의 경관변화 연구’에서 당시 사진과 함께 발표하였다. 1920년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방토목부에는 이 다리를 개인회사가 영리를 목적으로 가설하였으며 나주까지 항해하는 대형선박의 통행을 위해 가운데 부분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개폐식으로 만들었고 다리를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았으며 다리의 폭은 우마차가 다닐 수 있었다 한다.
▶홍어(洪魚)
가오리상목 중에서 홍어목에 속하는 생선으로, 한국에서는 삭힌 음식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원래는 서민들이 막걸리와 함께 즐기던 생선이었지만, 홍어 특유의 단맛과 감칠맛으로 점점 인지도를 높이더니 지금은 물량이 부족하여 칠레와 아르헨티나, 알래스카 산까지 수입을 많이 하는데, 한국에서 먹는 대부분 홍어가 수입산이 되었다. 특히 흑산도 근처의 참홍어는 아예 급이 다르게 취급받는다. 흑산 홍어는 지느러미에 부드러운 가시가 있고 몸빛이 조금 더 진하고 검붉은 기가 돌고 한번 맛본 마니아들은 살이 부드러우면서 찰지다고 한다. 그래서 부드러운 흑산도 홍어는 창자와 뼈까지도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먹는다고 한다. 한 번에 수천 개에서 수만 개의 알을 낳는 보통의 어류와는 달리 홍어는 한 번에 낳는 알의 수가 적다. 홍어는 번식력이 매우 낮은 데다가 치어 남획과 어장의 황폐화, 어장 환경의 변화로 인해 과거에 비해 자원량이 감소했다. 넓은 의미로 가오리라고 하면 홍어목을 포함한 가오리상목 전체를 이르는 말이므로 홍어도 가오리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한국에서는 홍어의 희소성과 맛 때문에 따로 높게 쳐 주는 홍어 및 그 외 다른 것을 망라해서 가오리로 부르는 편이라고 한다. 그 경계가 어느 크기냐 하면, 몸통 부분까지 뼈째 회를 쳐 먹을 수 있으면 간재미고 그보다 크면 홍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는 흑산도에서 많이 잡히는 고기 중의 하나가 바로 홍어다. 홍어는 한류성 어족이다. 홍어는 발효가 되면 냄새가 심한 고기다. 그런데 이 냄새는 홍어 피부에 쌓여 진 노폐물인 암모니아에 발효가 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대개 동물들은 노폐물을 오줌으로 내보냈는데, 홍어는 그 요소를 피부로 내보낸다. 그래서 홍어 피부에는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노폐물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런데 영산포 사람들이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잡아 영산포로 돌아오는 보름 정도의 기간에 이 암모니아가 가득한 홍어가 자연 발효가 된 것이다. 다른 생선은 상해서 먹지를 못하는데, 홍어만은 먹을 수 있었다. 암모니아 발효의 특징은 잡균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름 정도 기간이 지나도 완전히 썩지 않고 적당히 발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영산포 어부들이 흑산도에서 잡아 온 홍어를 꺼내 먹어보니 약간의 썩은 남새와 톡 쏘는 맛이 비위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게 별미였다. 이것이 영산포 사람들과 홍어 가게 주인장들이 설명하는 ‘삭힌 홍어의 탄생’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쇄환정책에 따른 영산도 사람들의 영산포 이주, 영산도 사람들의 흑산도 일대 바다에서의 조업과 영산포 귀향, 보름 정도 걸리는 항해 기간과 홍어의 적당한 숙성기간들이 딱 맞아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높은 ‘영산포 홍어’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잡힌 홍어의 원산지는 흑산도여야 하고, 가공지는 영산포여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온난화로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흑산도 쪽보다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도 앞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전라도 속담에 “오죽하였으면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을 홍어 거시기처럼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로 홍어 거시기가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을까? 홍어는 암컷이 맛이 좋다. 그래서 수컷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다. 그래서 홍어를 잡은 어부들 가운데 일부는 수컷 홍어를 잡으면 으레 수컷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수컷은 꼬리 부분에 두 개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데 어부들은 그 생식기를 싹둑 잘라서 암컷 홍어로 만들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허망하게 떼어져 버리는 수컷 홍어의 생식기를 빗대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이라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홍어는 전라도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삭힌 홍어가 그렇다. 홍어는 그 특유의 썩은 듯한 냄새와 톡 쏘는 독한 맛에 일반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들이면 묘한 중독 감에 빠지게 된다. 영산포 홍어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면 의외로 여성들이 홍어 정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삭힌 홍어 외에도 홍어를 주재료로 해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다양한 찜과 튀김 요리 등을 내놓은 것도 이유다. 홍어는 잔칫집이나 상갓집의 음식상 꼭 올라야 하는 고기다. 사람들은 상을 받을 때 홍어가 올라와 있으면 “제법 신경을 썼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혼주나 상주가 홍어 가격이 비싼 탓에 간재미 무침으로 홍어회를 대신하면 마음으로 몹시 서운해한다. 모처럼 홍어 한 점하려 했는데 그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기 때문이다. 홍어는 전라도 사람들이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과 경상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일반적으로 전라도 사람들만 홍어를 즐겨 먹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홍어 유통업자들에 따르면 울산과 창원 등지에 많은 홍어가 납품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상도 사람들이 삭힌 홍어 맛과 비슷한 돔배기 맛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이유인 듯싶다.
▶ 홍어(洪魚)의 거리
나주에서 영산강을 따라 도착한 옛 영산포구는 이제 ‘홍어의 거리’가 됐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이곳에 오면서 저절로 삭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다. 삭힌 홍어의 기원은 흑산에서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쇄환정책(刷還政策, 공도정책)으로 당시 흑산도의 별칭인 ‘영산(榮山)’사람들이 고려 말 1363년 남포강가(영산포)에 정착한 이래 1976년 영산강 하구언 물막이 공사 전까지 600년 이상 흑산도의 홍어가 영산포에 들어오게 되어 “나주 인근 고을의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라는 문구가 책에서도 나올 만큼 숙성 홍어로 알려진 고장이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이 영산포는 뱃길이 이어지는 수백 년 동안 홍어라는 구슬을 보배로 만들지를 못하였다. 뱃길이 끊어진 1976년 이후로는 영산포가 수산물의 집산지로의 기능을 상실함과 동시에 홍어의 상권 또한 광주와 목포 쪽으로 이동한다. 설상가상으로 1989년 7월 대홍수로 인해 영산강의 범람은 영산포의 홍어 상권을 암흑기로 몰아넣어 겨우 명맥만 유지한다. 그러던 중에 1997년 영산포 선창의 한일수산이 상호를 영산포 식품(주)으로 변경하고 풍부한 수입산 홍어를 이용하여 국내 최초로 소포장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전남이 아닌 외부 지역에 판매하면서부터 침체기를 겪던 영산포 홍어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기 시작한다.
숙성 홍어가 전남 지역의 한정 식품이 아닌 전국 식품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영산포의 기존 홍어 업계는 시설개선에 박차를 가하여 외부 판매에도 시야를 돌린다. 때를 맞추어 홍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주시는 외국산 홍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당시 외국산 홍어로 축제를 하는 것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2000년 ~2001년에 걸쳐 2회에 걸쳐 홍어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의 개최는 홍어와는 별 관련이 없는 시민들에게도 홍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함과 동시에 영산포가 어느 지역보다도 숙성 홍어에 있어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된다. 이와 더불어 영산포 지역민들이 주축이 되어 중단되었던 홍어 축제를 민간 주도 형태로 2007년부터 다시 개최하고 나주시에서는 선창 거리의 도로를 정비하는 등 영산포 홍어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영산포는 홍어의 고장입니다. 홍어는 예부터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던 음식이고 결혼식. 회갑, 초상 등 집안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다. 홍어가 빠지면 잔칫상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홍어는 전라남도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다. 영산포 선창가 일대에는 홍어 전문점 30여 곳이 성업 중입니다. 홍어를 먹으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풍습이 전해 내려와 홍탁이라 불려 왔다. 적당히 삭힌 홍어, 삶은 돼지고기, 묵은김치를 전라도 사람들은 홍어 삼합이라 부른다. 영산포에서는 김을 추가하여 4합이라 한다. 삼합과 사합을 먹어야만 홍어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삼합 홍어는 독특한 맛이 입에서 충돌한다. 입은 하나인데, 맛은 세 가지가 충돌한다. 기름진 돼지고기와 묵은김치 때문에 처음에는 홍어의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 가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홍어 특유의 향이 오감을 자극한다. 영산포의 홍어는 적극적인 나주시의 지원과 영산포의 옛 영광을 재현해보자는 열화 같은 영산포 지역민들의 성원과 홍어 종사자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현재 명실공히 전국 제일의 숙성 홍어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한다.
기아문화재지킴이 스터디 회원들과 함께 모처럼 나주 영산포 유채꽃, 내륙하천 유일한 등대, 개폐식 목교였던 영산교, 홍어의 거리 탐방을 끝내고, 홍어 삼합(사합)인 홍어 한점, 돼지고기, 묵은김치, 김 한 장을 입 안에 넣는 순간에 톡 쏘는 맛과 홍탁 한잔 들이키며 세상 부러울 게 없이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 참고문헌
1. 임경렬, [영산포 등대, 영산포 선창], 나주문화원, 2015.
2. 임경렬, [나주역사, 문화재 답사의 영산포 권], 나주문화원, 2015.
3. 최혁, [전라도 역사이야기 ‘홍어와 영산포’], 남도일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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