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채(油菜)꽃
우리는 들판에 흔히 볼수 있는 노랗게 피어난 유채꽃과 향기에 취해 그저 예쁘다고만 하지 어떤 사연을 가진 꽃일까?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재배했고 어떻게 이용했을까? 그래서 기아문화재지킴이들은 4월 둘째주 스터디를 나주 영산포 영산강변의 유채꽃과 내륙의 유일한 등대에 대해 알아보고자 주간근무를 끝내고 다녀왔다.
유채(油菜)는 기원전 4000여 년 전에 지중해 연안에서 재배되었고, 2000여 년 전에 중국과 한국, 일본 등으로 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서로는 13세기에 북유럽에서 오일 램프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유채 기름 추출물은 1956~1957년 식품으로 처음 시장에 출시되었다. 한국에 전래 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명나라때 한국에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허준(許浚, 1539~1615년)이 저술한 의학 서적인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순우리말로 '평지'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고, 조선 숙종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년)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록한 서적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운대(蕓薹)'라는 한자어 이름으로 등장하여 오랜 시간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
유채(油菜)는 겨자 또는 양배추과에 속하는 식물로 기름 종자 유채로 많이 알려져 있다. 밭에서 재배하는 두해살이 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채는 야생종 배추와 야생종 양배추가 자연교배한 품종이며 유명한 식물학자였던 고 우장춘 박사가 이 사실을 밝혀냈다.
꽃봉오리가 맺히기 전 여린 잎은 쌈채소, 국, 무침, 겉절이 등 여러 가지로 쓰이지만, 꽃은 그다지 식용으로 많이 쓰이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가 1962년부터 유료작물로서 본격적으로 재배하였으며, 수확량이 많고 품질이 좋으며, 빨리 자라고 추위와 습기에 잘 견디는 것이 우량품종이다. 한국에서는 남부지방과 제주도가 주요 산지다. 전 생육기간을 통하여 일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것이 좋고, 이식 재배인 경우 9월 하순에는 파종하여 한 달 후 이식하며 직파 재배인 경우에는 이보다 2~3주 늦게 파종한다고 한다.
유채의 종자는 기름으로 많이 쓰이며, 이른 봄에 올라오는 새싹은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되는데 잎은 데쳐서 유채 나물로 요리하기도 하며, 김치를 담가 먹는다. 유채의 종자에는 기름의 함량이 매우 높아서 세계적으로 세 번째로 높은 식물성 기름의 공급원이기도 하며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높은 단백질 식품의 공급이다.
식용 식물성 기름, 동물사료 및 바이오 디젤 생산을 위해 재배된다. 유채는 토양 침식을 방지하고 많은 양의 바이오매스를 생산하며 잡초를 억제하고 뿌리 시스템으로 토양 경사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겨울 동안 미국에서는 덮개 작물로 사용된다.
유채의 일부 품종은 연간 마초로도 사용되며, 인공 관절용 윤활제인 생물 윤활제 등으로도 사용된다. 유채의 씨앗은 40%가 기름으로 콩과 함께 세계적인 채종유(채소의 씨앗으로 짠 기름)이다. 맛이 쓰고 심장에 좋지 않은 에루크산이 들어있어 식용보다는 윤활유 용도로 쓰여왔다. 그러다 1970년대에 캐나다 과학자들이 쓴 맛을 줄이고 에루크산을 제거한 신품종 개발에 성공하면서 세계 식용유 시장에 혁명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설날이나 추석이면 어느 집에서나 카놀라유 식용유 선물을 받았다. 지금도 치킨집 같이 튀김 요리가 많은 곳에서는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카놀라유가 치매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연구 보고가 발표되고 유채가 대량생산을 위한 유전자 조작 (GMO) 식물의 대명사가 되면서 사람들의 선택을 머뭇거리게 했다.
그 결과 주부들은 포도씨 기름 등 대체유를 찾게 되고 카놀라유도 유기농 재배된 유채 씨앗으로 짠 제품을 선호하고 있다. 공업적으로는 유채가 화석연료를 대체할 바이오에너지의 원료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 나주 영산포 자기수위표(영산포 등대)
종 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129호 |
명 칭 |
나주 영산포 자기수위표(1915년대) |
지정(등록)일 |
2004년12월31일 |
소 재 지 |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659-3 |
영산포 수위관측소(등대)는 1915년에 세웠다. 영산포는 영산강에 자리 잡은 포구로는 유일하게 수위 관측과 등대의 역할을 하는 시설이 있다. 이 등대는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산업 시설물이다.
내륙 하천가에 있는 등대로, 등대 기능뿐만 아니라 해마다 범람하던 영산강의 수위 관측 기능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식민기지 건설에 필요한 영산강의 수위를 정확하게 관측할 필요에 의해서 당시로는 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몸통에는 거푸집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등대로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수위 관측은 물론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영산강 뱃길을 따라 곡식과 수산물을 실은 선박을 안내하는 등대 기능도 하였다. 등대 아랫부분에는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눈금이 그려져 있다. 1981년 영산호가 준공되면서 영산강 뱃길의 기능이 없어지자 등대 구실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영산강 수위를 측정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1989년 홍수로 인해 영산대교 중간 부분에 수위 관측 시설을 옮겼으나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이곳 아래쪽에 새롭게 설치하였다. 1915년에 설치한 영산포 자기 수위표는 당시의 영산포구의 모습을 기억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참고문헌
1. 김경규, [농업 기술 길잡이], 농촌진흥청, 2018.
2. 국립수목원의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서 검색.
3. 임경렬, [영산포 등대, 영산포 선창], 나주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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