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장의 순종 사진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5일)은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민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민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성인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1907년 7월 19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재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에는 사실상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王公族) 중 이왕가(李王家)의 수장인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으로 불렸다.
조선에 사진이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조선국 왕태자 시절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조선국 왕세자 시절 (1875년 3월 25일 - 1895년 1월 12일), 대한제국 황태자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 대한제국 황제 시절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및 이왕가 창덕궁 이왕 시절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까지의 사진들을 촬영 연대순으로 얼굴의 크기가 같아지게 사진의 크기를 조절하여 정리하였다.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의 비율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얼굴 윤곽과 비율
다섯 장의 순종의 사진에서 얼굴의 윤곽과 눈동자 간의 거리,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이마 끝부분, 코, 입, 턱의 위치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사진 위에 수평선과 빨간색 직사각형을 추가하여 확인해 보았다. 나이가 들어가더라도 이목구비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만나더라도 예전에 기억하고 있던 안면 윤곽 및 이목구비의 비율을 떠올리며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범인을 수배할 때 몽타주(montage)를 활용하기도 한다. 인상착의의 특징을 조합하여 범인의 현재 연령대에 맞게 그려낸 몽타주로 범인 검거에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순종의 안면 윤곽과 이목구비의 특징을 바탕으로 민비 사진으로 등장했던 사진들과의 유사도를 확인하는 방법을 적용해 보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물의 크기나 배경이 다른 사진을 적당히 나열하거나 보여주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게 하면 주의가 산만해지고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서 느낌에 바탕을 둔 주관적인 생각을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주관적 판단의 결과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라서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보다 객관성이 있고 검증도 가능한 방법을 찾아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
민비 사진과의 비교
다섯 장의 순종 사진에 한 장의 민비 사진을 추가하여 안면 부위별 이미지를 비교하고 안면 비율을 비교해 보자. 눈과 눈썹 부위, 코, 입과 입술 부위를 분리해서 비교해 보고 얼굴 부분을 비교해 보면 민비 사진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위화감이나 이질감이 없다. 이목구비의 생김새와 안면 비율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양 눈의 눈동자 사이의 간격을 같은 크기의 각각의 인물 사진 위에 빨간 직사각형을 덮어씌워 이목구비와 안면 비율을 눈대중이 아닌 확인 가능한 방법으로 비교해 보았다. 결과는 명확하다. 민비 사진으로 소개된 사진의 이목구비와 안면 비율이 순종의 사진과 일치하는 것이 확인된다. 가족관계가 성립한다면 유전적인 특징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세 종류의 민비 추정 사진의 얼굴 크기가 같아지도록 조정하여 사진의 얼굴 윤곽 및 안면 비율을 같은 방법으로 비교해 보았다. 세 종류의 사진 모두 연령대가 다른 동일 인물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얼굴 윤곽 및 안면 비율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순종의 사진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얼굴 윤곽 및 안면 비율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요즈음처럼 성형미인이 있었을 리 없으니 자연 상태의 얼굴이었을 것이므로 세 가지 사진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세 사진 모두 근거 없이 나온 사진이 아니고 당대에 민비의 얼굴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민비의 사진으로 소개한 것이다. 서양과 일본에서 같은 사진을 두고 궁녀로 소개되기도 한 것은 조선 여성의 얼굴 생김새와 복식을 소개하기 위하여 어렵게 입수한 사진을 조선에서의 자신의 경험, 생각, 주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소품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의 7년 반의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고 현재 미국에서 32년째 거주 중이다. 그래도 일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고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알지 못한다. 130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이 불과 며칠 또는 몇 달 낯선 땅을 돌아보고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정보는 옳은 정보뿐이었을까? 누군가로부터 입수한 조선 여인의 사진이 있었다면 사진을 소개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색다른 모습의 신기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적은 사진의 설명이 130년 후에 사진이 촬영된 나라에서 이렇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2011년에 미국에서 우표 도안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미주 헤럴드 경제에서는 “미 우정국, 자유여신상 이미지 잘못 골라 망신‘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담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연방우체국(USPS)이 최근 ‘자유의 여신상’얼굴 모습을 도안으로 하는 새 우표를 내놓았지만 이 사진은 뉴욕(New York)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찍은 것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Las Vegas)의 한 카지노에 있는 복제품을 촬영한 것이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만든 지 14년밖에 안 된 카지노의 복제품 사진이 연방우체국의 우표 도안에 활용되면서 카지노 여신상의 위상은 급격히 높아졌지만, 당국은 망신살이 뻗치게 됐다. NYT는 우표 도안 사진이 자유를 찾아 오랜 여정을 거쳐 뉴욕에 도달한 수백만 이민자들을 반긴 남부 맨해튼의 125년 된 명물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즉,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카지노 여신상’인 셈이다. 이 문제는 130년 전의 민비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130년 전에 잠시 조선을 들른 적이 있는 외국인이 적어 놓은 사진의 설명을 그대로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본인이 촬영한 사진도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도 않으며 순수하지도 않다. 의도 없는 행동은 없다. 특히 모든 저술 활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집필하기 때문에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민비 사진의 착시효과
세 종류의 민비로 주장된 사진이 주는 이미지는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우선 연령대가 다르고, 표정도, 머리 모양도, 의복의 형태도 다르며 사진의 배경도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여자라는 것, 의자에 앉아서 촬영했다는 것과 한복 또는 궁중의상 같아 보이는 옷을 입고 촬영했다는 것 정도이다. 사진의 색상도 소개된 사진 자료에 따라서는 세피아 톤 또는 하프톤 이미지로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진을 육안으로만 관찰하고 느낌을 정리하려고 하면 착시효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진을 촬영할 때는 촬영자가 한정된 유리건판 면적에 꼭 담고 싶은 것을 자신만의 구도로 담으려고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촬영한 사진을 보게 되면 좋든 싫든 촬영자의 시각과 시점에서 촬영 대상을 보게 되는 최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문제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 사진에서 비교하고자 하는 영역을 최대한 같은 크기로 만들고 색상도 통일해 주면 그나마 착시효과를 줄일 수 있다.
착시효과의 제거 후의 문제의 사진 비교
문제의 세 종류의 사진에서 인물 부분의 크기를 같게 조정하고 인물의 머리 모양과 복장으로 인한 느낌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 인물의 얼굴 부분만 교체해 보았다. 사진의 색상도 세피아 톤과 하프톤의 두 가지 형태로 표현해 보았다. 원 이미지에서 오는 강렬한 느낌이 상당히 완화되어 얼굴 모습에만 집중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동일인의 사진으로 촬영 시기만 다르다고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는 사진의 조합이 완성되었다. 문제의 민비 사진 세 종류가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십 년간 책이나 잡지에서 소개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인물의 윤곽 안면 비율 모두 거의 판박이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조선 여인의 사진을 무작위로 골라서 소개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다. 저술자가 민비 또는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아무 사진이나 실으면서 왕비라고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 칼럼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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