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여사의 자서전
이방자(李方子 또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1901년 ~ 1989년) 여사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1920년 4월 28일에 결혼했다. 영친왕은 1920년 4월 27일에 일본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고 진급 다음 날인 4월 28일에 동경의 자택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1858년 – 1936년)는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선전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정략결혼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친왕의 공식 지위는 이왕세자였고, 순종황제가 사망한 후에 이왕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이방자 여사는 결혼 당시에는 '이왕세자비 마사코 여왕(李王世子妃方子女王)'으로 불렸고, 영친왕이 이왕에 오른 뒤에는 '이왕비 마사코 여왕(李王妃方子女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7년(쇼와(昭和) 22년) 왕공족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서 '이방자(리 마사코) 여사'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의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새롭게 정권을 잡은 박정희(박정희(朴正熙, 1917년 - 1979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에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1970년, 남편인 영친왕이 사망한 후에는 남편과 구상해서 시작한 사회봉사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1년에는 지적장애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73년에는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1989년에 타계할 때까지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아 왔으며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일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소용돌이치던 국제정세 속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된 측면이 많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심리적, 경제적,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한 시대를 훌륭하게 살아내신 분임은 틀림없다.
이방자 여사는 1989년에 타계하기 2년 전인 1987년에 일본 삼성당(三省堂, さんせいどう)에서 자서전 성격의 ‘세월이여 왕조여 : 최후의 조선왕비 자서전(歳月よ王朝よ:最後の朝鮮王妃自伝)’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출판 당시의 연세가 86세로 말년에 직장암 수술을 받고 일본에 가셨을 때 원고 정리가 마무리되어 자서전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로 쓰인 이 책의 내용과 목차가 간단히 소개된 것이 있어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1989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셔서 같은 해 4월 30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다.
자서전 속에 등장하는 민비의 초상화
이 책의 제3장 이 전하의 통곡 (第3章 李殿下の慟哭)에 해당하는 부분의 34쪽과 35쪽에 1895년 10월 8일에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34쪽 하단에는 떠구지와 쌍 비녀를 한 낯익은 사진이 민비(閔妃)로 소개되어 있다. 필자가 빨간 직사각형으로 하이라이트 한 부분에는 ‘閔妃。死後、明成皇后の名をおくられる。(민비. 사후, 명성황후라는 칭호가 증정됨)’이라고 적혀있다.
민비는 영친왕 이은에게는 아버지 고종의 정실부인인 적모(嫡母)에 해당한다. 이방자 여사에게 민비는 시적모(媤嫡母)가 되며 매우 가까운 가족이다. 자신의 시모님에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궁녀의 사진을 사용했을까?
같은 제목의 우리말 자서전과 일본어 자서전
이방자 여사는 1984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세월이여 왕조여’라는 칼럼의 기사를 모아서 1985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하였고, 이방자 여사의 사후인 2013년에 강용자 지음, 김정희 엮음으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1987년 일본에서 출판된 ‘세월이여 왕조여 : 최후의 조선왕비 자서전(歳月よ王朝よ:最後の朝鮮王妃自伝)’은 1985년에 같은 제목으로 우리말로 출판된 책을 일본어판으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이방자 여사는 모국어가 일본어이고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훨씬 자유로웠으므로 어쩌면 원고는 일본어로 작성되었고 그것을 1984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하면서 우리말로 번역해서 기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논란의 민비 사진이 일반인이 아닌 이왕세자비 (1920년 4월 28일 - 1926년 4월 25일), 이왕비 (1926년 4월 27일 - 1947년 5월 3일)를 역임한 왕실의 중요 인사가 사용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민비를 기억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많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는 민비를 보았을까?
민비가 시해된 것은 1895년 10월 8일 밤이다. 과연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는 민비를 만날 수 있었을까? 정답은 ‘만날 수 없었다’이다. 시대적 상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연표를 만들어 보았다. 황실 인물들의 생몰년도, 수명, 굵직굵직한 사건, 을미사변 당시의 연령 등을 표시하였다. 영친왕 이은이 궁인 엄씨 (후에 순헌황귀비로 책봉) 소생으로 태어난 것은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12일 후인 1897년 10월 20일의 일이기 때문이다. 영친왕의 생모인 궁인 엄씨는 이은의 출생 이후 1897년 10월 22일에 귀인(貴人), 1900년 8월 3일에 순빈(淳嬪), 1901년 10월 14일에 순비(淳妃), 1903년 12월 25일에는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다. 이방자 여사는 1901년 11월 4일생이므로 을미사변으로부터 6년 27일 후에 태어났다.
영친왕 이은의 이복형인 순종과 의친왕 이강(李堈)의 을미사변 당시의 나이는 각각 21세와 18세였다. 민비는 순종에게는 생모이고 의친왕 이강(李堈)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적모였다. 고종도 1919년까지는 생존해 있었으므로 영친왕이 22살 때까지는 민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왕실 관계자도 민비의 인상착의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과 결혼한 것이 1920년 4월 28일로 고종이 승하한 다음 해이므로 고종을 만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을 전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방자 여사가 문제의 사진이 민비가 아닌 궁녀의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고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자신의 회고록에 그 사진을 굳이 넣었을까? 아마도 이방자 여사 본인은 문제의 사진이 논란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본인도 민비의 사진이 맞는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894년 발행 일청한(日淸韓) 삼국 귀현의 초상화
19세기 말 조선을 둘러싸고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이나 청나라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개항하고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힘을 키워온 일본이 제국주의의 흐름을 타면서 조선과 중국 내에서 벌어진 청나라와 일본과의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년 7월 25일 - 1895년 4월 17일)과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러일전쟁(러日戰爭, 1904년 2월 8일 - 1905년 가을 무렵)에서 연승하게 된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국 권력자들의 초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1894년 9월 11일 일본 동경 동양당(東陽堂, とうようどう)에서 인쇄한 일본, 청나라, 한국 고위직의 초상화(日清韓三国貴顕之肖像, 47.4 x 63.8 cm)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화가는 제3대 타키가와 타로(Takigawa Taro III, 三代目瀧川太郎), 인쇄는 카네코 토요키치(Kaneko Toyokichi, 金子豊吉), 출판은 화가인 제3대 타키가와 타로(Takigawa Taro III, 三代目瀧川太郎)가 담당한 것으로 적혀있다. 상단에는 일본의 권력자 3명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가운데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년 – 1912년)의 초상화가 御尊影(ごそんえい, 초상의 높임말)로 표시되어 있고 왼쪽에는 有栖川宫殿下(ありすがわのみやでんか, 1862년 – 1913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伊藤伯라고 적혀있고 伊藤博文(いとうひろぶみ, 1841년 – 1909년) 백작(伯爵)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단에는 왼쪽으로부터 대원군(大院君), 가운데가 조선국왕(朝鮮國王), 오른쪽은 청국황제(淸國皇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4명의 초상이 약간 작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부터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大鳥公使(おおとりこうし, 오오토리 공사), 大島少将(おおしましょうしょう, 오오시마 소장), 청나라의 원세개(遠世凱)의 초상화이다. 모두 실존 인물이며 초상화는 사진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대원군과 고종의 초상화도 같은 시기에 소개된 많은 출판물의 모습과 같다.
1894 - 1895년에 소개된 문제의 사진
1894년 9월 10일에 일본 동경 신양당(信陽堂)에서 인쇄하고 10월 10일에 발행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의 대원군과 고종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옥의 장식이나 주름을 제외하면 초상화의 구도나 모습이 거의 같다. 그렇다면 ‘조선국귀현초상’에 실린 떠구지에 쌍 비녀를 한 왕비민씨(王妃閔氏)의 초상화도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894년 11월호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의 ‘조선의 왕비’기사 본문에 의하면 왕비는 만날 수도 없으며 도성 출입을 거의 하지도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 떠구지와 쌍 비녀를 한 문제의 사진을 대기 중인 조선 왕비의 최고상궁(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를 쓴 본인은 왕비를 보지 못했지만 왕비를 본 미국 여인들한테서 들은 인상착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The queen of Korea is now forty-four years of age, being just one year older than her husband. She is of medium height, and her form is slender and straight. Her manner is pleasing, and she is always described as “every inch a queen.” She is by no means bad-looking. Her face is long, and every line of her features beams with intelligence and vivacity. She has a high forehead, a long, slender, aristocratic nose, and her mouth and chin indicate determination and character. Her cheek-bones are high, her ears are small, and her complexion is the color of rich Jersey cream. Her eyebrows are after the approved style of Korean beauty, the hairs having been pulled out so that they form an arched thread of black over her eyes. These are almond in shape, and they fairly snap with life. They are keen, business-like eyes, and they see everything, being intellectual rather than soulful. The queen’s hair is jet black. It is parted in the middle, is combed perfectly smooth away from the forehead and brought down over the ears, and rolled in a low coil which rests on the nape of her neck. Here it is fastened with hairpins of gold or of silver, each a foot long and as big around as your finger. The queen has a good mouth, full of well-formed, large teeth; and when she laughs, which is quite often, she shows the upper ones.
이제 조선의 왕비는 남편보다 한 살 많은 44세입니다. 그녀는 중간 키에 몸매가 가늘고 곧습니다. 왕비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며 항상 "모든 면에서 왕비답다"고 합니다. 절대로 못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얼굴은 길고,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지성과 활력이 있어 보입니다. 높은 이마와 길고 가는 귀족적인 코를 가지고 있으며 입과 턱은 결단력이 있다는 인상을 풍기며 성질도 있어 보입니다. 왕비의 광대뼈는 높고, 귀는 작으며, 안색은 진한 살색입니다. 눈썹은 조선 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며, 눈썹은 뽑아서 눈 윗부분에 검은 띠 모양의 아치처럼 만듭니다. 아몬드 모양이고, 늘 그렇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양의 눈은 예리하고 사무적인 느낌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며, 감정이 풍부하다고 하기보다는 지성적인 느낌입니다. 왕비의 머리카락은 칠흑색입니다. 그것은 가운데에서 가르마를 타고 이마에서부터 완벽하게 매끄럽게 빗어서 귀 위로 내려와 낮은 코일 모양으로 말려 목덜미에 닿습니다. 여기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머리핀으로 고정했는데, 각 머리핀은 길이가 1피트 (약 30 cm), 둘레가 손가락만큼 큽니다. 왕비는 입 모양이 좋고 큰 이가 가지런하게 나 있어 웃을 때 자주 윗니가 보입니다.
She dresses in the conventional Korean style, and the photographs which I give of Korean ladies show the same costume. They wear a short jacket which covers the shoulders and extends about four inches below the armpits, the front just covering the breasts, which are also bound in by the wide bands of the skirts. These skirts reach from the top of the breast to the floor; and the queen’s are so full and so long that she has to hold them with her hands when she walks. They are of different colors, are laid in plaits, and the band at the top is about eight inches wide.
왕비는 전통적인 조선 스타일로 옷을 입는데, 이 기사에 함께 실은 조선 궁녀의 복장과 같습니다. 조선의 여인들은 어깨를 덮고 겨드랑이 아래 약 4인치 (10 cm) 정도 길이의 짧은 재킷(저고리)을 입는데, 앞면은 가슴만 덮고 스커트(치마)의 넓은 끈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치마는 가슴 위에서 바닥까지 닿습니다. 왕비의 옷은 너무 여러 겹이고 길어서 걸을 때 손으로 잡아야 합니다. 왕비의 옷은 색깔이 다르고, 엮어져 있으며, 가슴에 두르는 띠의 폭은 약 8인치(약 20cm)입니다.
왕비도 궁녀 사진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마는 길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귀는 작고 눈썹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고 적었다. 직접 만나지도 않았음에도 꽤나 상세하게 묘사했다.
필자가 기사를 쓴 당사자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았다. 130여 년 전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지의 왕국에 가서 잠시 머물렀다면 이 정도로 구체적인 내용을 수집할 수 있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책이나 기사로 펴내면 현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소개된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여행 관련 책자에 소개된 내용만 전적으로 믿고 여행을 떠나서 기대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즈음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 세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으므로 어떤 주장도 쉽게 확인된다. 현재의 생활환경을 토대로 130년 전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895년 2월에 일본 춘양당(春陽堂) 출판사에서 발간된 전국사진화보(戦國寫真画報) (9)집에 실린 남녀 한 사람씩의 사진이 실린 기사의 예를 살펴보자. 남자 사진은 조선관리제복(朝鮮官吏祭服, AN OFFICIAL IN CEREMONIAL LOBE)으로 여자 사진은 조선 궁녀(朝鮮宮女, COREAN COURT MAID)로 설명되어 있다. 대원군, 고종, 순종의 사진은 많이 알려져 있었으니 제복을 입은 남자 관리가 왕족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만약에 제복을 입은 여자 사진이 없었다면 내용의 전달이 어려웠을 것이다. 제복을 입은 남자 관리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사진을 입수할 수 있다면 활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진 자체가 귀한 시대이기도 했고 쉽게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가지고 있는 사진으로 적당한 설명을 붙여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저작권이 크게 문제가 되던 시기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여러장 인화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판매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보 교환은 어느 나라 말로 했을까? 사진이 소개된 나라에서 사용되는 언어만 나열해도 우리말,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의 8개 국어이다. 실제로는 더 많지 않았을까? 대화가 잘 통했을까? 의미는 잘 전달되었을까? 설명은 참고 자료 정도로 생각하고 사진의 인물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민비 초상화에 대한 단상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문제의 세 종류의 사진에서 인물 부분의 크기를 같게 조정하고 인물의 머리 모양과 복장으로 인한 느낌의 차이를 제거하고 비교하면 사진의 인물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촬영 시기가 달라서 동일 인물의 연령대가 다른 사진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세 종류의 사진 모두 인물의 이목구비의 비율이 거의 일치한다. 만약에 무작위로 조선 여인의 사진을 골라서 비교한다고 하면 과연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의 비율이 일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미지 합성 실험을 통한 조사
세 종류의 민비 사진을 조합하여 사진 간의 얼굴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 PicMan으로 조사해 보았다. 너무나도 자명한 결과가 나왔다. 눈대중으로는 각자의 느낌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전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사진의 조합으로 이미지를 합성해 보니 이목구비의 비율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얼굴은 이목구비의 위치와 모양에 거의 차이가 없어 선명하게 합성되었고 머리와 옷 부분은 서로 다른 여러 장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흐리게 합성되었다.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왔던 민비의 사진 3장은 모두 동일 인물을 수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두고 촬영한 사진일 개연성이 높다. 세 사진 모두 민비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비 사진을 둘러싼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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