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선생, 판소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 조선 최고의 아름다운 혁명가 동리 신재효를 판소리의 아버지라 부른다
- 신재효 판소리와 메세나운동으로 고창 땅에서 별처럼 빛나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6.27 14:00 | 최종 수정 2024.06.27 20:01 의견 0

동리 신재효 선생의 영정 사진과 '도리화가' 영화에서 동리 선생의 역할을 맡은 류승룡 배우 모습
(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사진)

판소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한국의 자랑스런 음악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다. 고수(鼓手)의 장단에 맞 춰 창(唱, 노래)을 하거나 장단 없이 서사적 사설(辭說)과 발림(몸짓)이 덧붙고 고수와 관객의 추임새가 어울려 신명난 한편의 종합예술이다

판소리는 17세기경 등장하여 18세기 중반에는 조선 최고의 대중문화가 되었다 판소리는 창법에 따라 크게 동편제(東便制), 서편제(西便制), 그리고 중고제(中高制)로 나눈다. 신재효 선생은 조선 후기의 판소리 작가이자 이론가이다. 광대들의 소리를 모아 판소리 6마당을 만들었으며, 판소리를 민족 문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여기에서는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선생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015년 개봉작으로 이종필 감독 영화 "도리화가"의 여러 장면들...

▶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는 19세기에 고창 지역에서 활동했던 중인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다. 신재효는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아 본인도 고창 지역에서 이방, 호장 등을 역임하며 판소리 창자(唱者, 창, 아니리, 발림을 구사하며 판소리 공연을 주도하는 연희자를 지칭하는 용어)를 비롯한 광대들을 각종 연회에 섭외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 과정에서 판소리라는 연희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는 대흉작으로 굶주리고 있던 궁민(窮民)들을 구제하고, 경복궁 건립을 위한 기금을 낸 공로를 인정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등의 품계를 받았지만, 향반들의 세력이 드센 지방에 들어온 이주민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행세를 하기는 어려웠다.

신재효는 판소리 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첫째,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업적을 들 수 있다. 그는 판소리 명창 김세종(金世宗)을 자신의 집에 소리선생으로 기거하도록 하여, 판소리 교육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동편제(東便制)와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둘째,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가 및 평론가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단가 광대가(廣大歌)를 통해 판소리의 이론적인 측면을 밝히는 한편, 판소리 창자(唱者)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꾸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의 4대 법례를 제시했다. 판소리 창자(唱者)도 일종의 배우인 만큼 우선 외모가 반듯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물치레를 첫째로 꼽은 듯하다. 그리고 판소리의 내용인 사설을 잘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 사설치레를 둘째로 꼽았다. 득음은 판소리에서 필요로 하는 음색과 여러 가지 발성의 기교를 습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판소리에서는 거칠고 쉰 듯하며 탁한 목소리, 즉 '곰삭은 소리'를 구사하는 것을 높이 친다. 너름새는 춤이나 몸짓, 표정 등을 이용해 사설로 그려지는 장면을 보조적으로 보여 주는 행위이다.

▪️셋째,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노래를 지었다. 그가 지은 노랫말에는 재산을 모으는 방법이나 서양 세력의 침입을 걱정하는 등 사회적인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가 진채선으로 하여금 경복궁 낙성 기념 공연에서 자신이 지은 명당축원(明堂祝願), 성조가(成造歌), 방아타령 등을 부르게 했다고도 전한다. 그 밖에 오섬가(烏蟾歌) · 도리화가(桃梨花歌)· 허두가(虛頭歌) 등이 대표적이다.

▪️넷째,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주로 백성들 사이에서 공연되던 광대들의 소리를 통일해 <춘향가>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판소리 6마당으로 체계화했다. 또한 판소리의 노랫말을 판소리 사설 문학으로 발전시켰으며, <박타령>과 <토끼 타령>은 창극으로 만들기도 했다. 판소리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그는 조선 고종 때인 1884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창 판소리박물관 표지석과 고창 동리 신재효선생의 고택 전경 및 판소리 명창 김세종(金世宗) 소리선생과 제자들 모습(사진촬영 김오현)

▶ 고창(高敞) 신재효 고택(申在孝 古宅)

종 목 국가민속문화유산
명 칭 고창 신재효 고택
지정일 1979. 01. 26
소재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번지

판소리 이론가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살던 집으로 철종 1년(1850)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1899) 그의 아들이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소담한 초가집 사랑채로 보고 있는데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국가에서 관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고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에 '一'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구성은 앞에서 볼 때 왼쪽부터 부엌 1칸, 방 2칸, 대청 1칸, 2칸을 합하여 통 1칸으로 만든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을 뺀 나머지 앞면 5칸은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과 방 사이에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든 점과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은 점이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끈다. 현대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인(名人) 신재효의 옛 집으로서 가치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고창군의 신재효 판소리 사설본(사진제공 문화재청)

▶ 신재효(申在孝) 판소리 사설본(辭說本)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
명 칭 신재효 판소리 사설본
지정일 2022. 05. 20
소재지 전라북도 고창군

신재효(1812∼1844)는 고창의 아전 출신으로 판소리를 후원하고 집대성하여 19세기 판소리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을 고창지역 후손과 이웃들이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필사한 사설본 27점의 자료가 전하며, 필사자 별로 나누면 1898년 <춘향가> 를 포함한 성두본(星斗本) 5종 8책,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 5종 5책, 고수 와촌본(瓦村本) 2종 2책, 청계본(淸溪本) 9종 12책 등이다.

신재효 판소리가 고창 지역 향반층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으며, 김창환, 김소희, 김연수 등의 근현대 명창들의 사설에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후기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인 열여춘향슈졀가, 심청가, 퇴별가(수궁가), 화룡도(적벽가) 등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본 사설본은 신재효의 원본에서 파생된 필사본들로서 문헌학적으로 원전(原典)으로 평가되고 있어 자료의 희소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고창 판소리 박물관의 전경과 내부 모습

1812년(순조 12) 태어난 신재효(申在孝)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중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판소리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작품을 정리 및 보급하며,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여 판소리 예술의 발전에 독보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한국 전통 음악의 중요한 문화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참고문헌

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2. 유기상, [신재효 판소리, 동학농민혁명의 '불쏘시개'], 전북의 소리, 2023.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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