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지연 시민기자
서울역은 동아시아 근대사와 철도사, 건축사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이곳을 거쳐 간 뜨거운 사람들의 사연을 빼놓을 수 없다. 신문물의 도입 창구이자 가까이는 만주 대륙, 멀리는 소비에트를 거쳐 유럽까지 실어다 줄 꿈의 여행 수단인 기차가 출발하던 경성역. 하지만 일제강점기때 경성역은 독립투사들이 피 튀기는 격전을 벌이던, 치열한 삶과 죽음의 현장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5일에는 남대문역(경성역의 옛이름)에서 약 1만 여명이 학생들이 모여 학생항일 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던 유관순도 학생단 시위에 합류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 당하기도 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측의 교섭으로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난 후 학교 휴교령이 떨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이듬해 순국했다.
반 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기차에서 내려 마차로 갈아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폭탄은 성능이 시원찮았던지 표적에게 와 닿기도 전에 터져버렸고 사이토의 명줄을 끊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근처에서 취재를 하던 기자들과 호위하던 순사 등 3명의 일본인이 죽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해 봄, 완전히 진압된 줄 알았던 3.1운동 그리고 10년 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된 사건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던 일본인들에게 이 암살미수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보름 만에 폭탄을 던진 인물이 잡혔는데 놀랍게도 64세 노인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강우규,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투사 중 최고령자로 기록되고 있다. 강우규는 1859년 6월 2일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태어나 한의학을 배워 환자를 치료하다가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개화사상에 눈 뜬 걸로 알려져 있다.
한 때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게 빼앗기자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 라오허현에 정착해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신흥촌을 건설하고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 8월 8일경 영국제 폭탄을 들고 경성에 잠입했다. 영락없는 노인 행색의 그를 의심하는 순사는 없었고 검문 없이 환영인파에 잠입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거사는 실패했고 강우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재판정에서는 재판장을 꾸짖기도 하고 일제를 성토하는 등당당한 모습을 보여 한인들은 물론 일본 기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강우규는 1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교수형 당하기 전 다음과 같은 짧은 유시를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962년에 강우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2011년에는 의거 92주년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세워졌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폭탄을 던지려던 그 모습을 조각가 심정수 씨가 만들었다. 이곳에서 해마다 추모식이 열린다.
옛 서울역사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동상에 눈길조차 두지 않고 바쁜 걸음을 옮길 뿐이다. 아무도 그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것 같지도 같다. 기왕이면 유동인구가 더 많은 KTX서울역 앞에 세웠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까? 그래도 늦은 감이 있지만 이렇게라도 독립투사의 흔적이 남게 되어 다행이다. 독립운동가의 치적을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으니까.
1899년 대한제국 시절 최초로 부설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완공된 경인선 철도가 놓인 지 어언 100년이 지났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 역은 부산을 출발해 만주대륙과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국제 철도의 거점역이었다. 지금은 해외 여행하면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그림만 떠오르지만 백 여 년 전엔 철도로 해외여행이 가능했다니 까마득한 전설 속 이야기처럼 들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서 식민지 백성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줬던 손기정 선수. 그는 6월 3일 도쿄를 출발, 시모노세키에서 배편으로 부산에 입항한 후 부산역에서 임시특별열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했다. 다음날 경성역을 출발해 신의주, 하얼빈 등을 거쳐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열차를 갈아타고 13일만에 베를린에 입성했다.
자전적 소설 <방랑기>로 유명한 일본의 근대 문인 하야시 후미코도 1931년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성역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갈아타고 파리까지 갔다. 전후 세대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경로지만 분단되기 전 한국과 유라시아 대륙은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연속 공간이었다.
이제 전국이 3시간 생활권으로 좁아졌고, 서울-부산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한 21세기가 되었지만 경성역 시절보다 운신의 폭은 훨씬 좁아진 셈이다. 우리의 시야와 상상력은 물론 호연지기도 쪼그라든 느낌이다. 한때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이상 끊겼던 남북한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연결을 위한 협상이 추진되었지만 그것도 흐지부지 되어버려 현재까지 진전이 없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 남북철도가 연결되고 서울에서 평양,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하고 유럽까지 갔던, 손기정의 여정은 한 시절 일장춘몽이었을까. 그 길을 통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맹활약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물론 조선족, 고려인 등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좌절된 꿈과 반 세기 훨씬 넘게 반 토막 난 상상력도 복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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