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천 다리 이야기 2 - 광주교, 부동교, 뽕뽕다리

광주교는 1907년 광주 지역에 가설된 '최초의 근대식 나무다리'
부동교 밑 작은 장터에서 1919년 3월10일에 '3.1운동 만세 시위 현장'
1950년대 광주천에 놓였던 바닥이 구멍이 뚫린 철판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 '뽕뽕다리'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1.29 08:10 | 최종 수정 2024.01.29 10:25 의견 5

1907년 광주 최초의 근대식 나무다리였던 광주교를 2006년 새롭게 중건된 동그란 고리 모양의 조형물이 특징인 광주교 전경(사진촬영 김오현)

광주천은 광주광역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총길이는 약 19.85km(국가하천12.2km, 지방하천7.65km )에 달한다. 광주천에는 동구 용연동의 제2수원지 아래의 다리로부터 영산강과의 합류점인 치평동의 상무대교(제2순환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두 46여개의 다양한 다리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다리 중에 광주교, 부동교, 뽕뽕다리 등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935년 전경, 1951년 주변 풍경, 2024년 광주교 전경(사진제공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


▶ 광주교(光州橋)
충장로와 광주공원을 잇는 다리이다. 1907년 광주 지역에 가설된 최초의 근대식 나무 다리로 처음 건설되었다. 이전까지는 나무와 흙으로 만든 흙다리가 광주천 곳곳에 있었는데 이것들은 영구적인 다리가 아니었으므로 광주교가 사실상 광주천 최초의 교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광주천의 폭이 매우 넓었기에 길이가 100m에 달했다고 한다.
광주교가 가설되자 당시에는 남쪽에서 오는 사람들과 차량은 모두 광주교를 거쳐야만 광주의 중심가로 진입할 수 있었다. 당시 다리들은 대부분이 흙다리였는데, 흙다리의 구조가 차량이 통행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광주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근대화가 이루어진 만큼 그에 맞는 근대식 교량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광주교를 가설하게 된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광주교에 몰리자 일본인들에게는 ‘신사가는 길’로 불리고, 우리들에게는 ‘장터가는 길’로 불렸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는 광주천의 모든 구간에 대한 개수공사가 시작되었다. 구불구불하게 돌아 흐르던 광주천 유로가 직선 하천으로 바뀌게 되면서 광주천의 폭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광주교 또한 줄어든 광주천의 폭에 맞춰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이후 1935년에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새로 지어지는데 광주천 직강화 이후였으므로 길이가 100여m에서 약 60m 정도로 짧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에는 확장공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공사가 이루어지졌다.
지금의 광주교는 2006년 세워진 것으로 광주천 환경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광주공원의 일부이며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동그란 고리 모양의 조형물이 특징이다.

1910년대의 부동교의 목교 모습과 현재의 부동교 모습(사진제공 광주광역시시청각자료실)


▶부동교(不動橋)
광주광역시에 설치된 소교량으로 남구 구동과 동구 불로동을 이어주며, 그 사이의 광주천을 건널 수 있도록 가설된 교량이다. 부동교는 '불로동다리'로도 불리는데, 조선시대부터 불로동 일대를 지칭하여 부동방면(不動坊面)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의 명칭이 변형되어 부동정(不動町)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부동교라는 교량명은 이에 유래한다.
광주 3.1 운동 만세 시위지로 이곳 부동교 밑 광주 천변은 작은 장날이던 1919년 3월 10일 양림동의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등의 학생들을 비롯한 각지에서 모인 시민 등 1천여명이 대한 "독립 만세" 를 불렀던 현장이다. 또한, 기삼연 의병장 순국지로 이곳 광주천변 모래사장은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한말 호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기삼연의병장이 설날이던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호송된 후 재판없이 총살된 현장이었던 곳이다. 3.1운동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천 명의 인파가 집결하였던 장소로 불의에 맞서 대항하던 우리 민족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부동교는 광주천을 건널 수 있는 인도로 사용되는 교량으로 총 길이는 60m, 교량의 총 폭은 5.5m, 유효 폭 넓이는 4.9m, 교량의 높이는 5m이다. 부동교는 1933년에 가설된 교량으로 1920년대 진행되었던 광주천 개수공사 사업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개수공사가 진행되면서 광주공원 초입에 새로 형성된 사정시장(社町市場)과 광주광역시 시내 사이를 잇는 교량의 필요로 가설된 교량이 부동교였다. 부동교는 1933년에 준공되었고, 현재 차량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2023년 새롭게 만들어진 임동 뽕뽕다리 모습


▶뽕뽕다리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의 뽕뽕다리와 북구 임동 뽕뽕다리가 있었는데 구멍이 뽕뽕 뚫린 철판으로 만들어진 다리이며 1950년대 광주천에 놓였던 다리로, 바닥이 구멍이 뚫린 철판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부터 광주시는 인구가 급증하자 빠른 도시화를 위하여 교량 가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은 철골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교량이 아닌 미군이 쓰던 PSP강판으로 다리를 건설해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탄생한 교량이 '뽕뽕다리'이다. 뽕뽕다리의 재료는 PSP강판 혹은 유공강판(有孔鋼板)으로 불리는 철판이다. PSP강판(유공강판)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스콜(열대 지방에서 대류에 의하여 나타나는 세찬 소나기)이 심하게 발생하는 태평양 지역에서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철판에 구멍을 내서 비행활주로의 포장재로 썼던 것이다. 6.25전쟁 이후 경제가 어려웠던 우리나라는 미군이 쓰던 이 철판을 수입해서 교량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교량이 가설된 후 사람들은 다리의 뽕뽕 뚫린 구멍을 보고 ‘뽕뽕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동 뽕뽕다리는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방직공장과 서구 양동 발산마을 사이를 연결 시켰는데 방직산업이 호황이던 시절, 광주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출퇴근을 위해 이 다리를 많이 이용하였다. 1973년 지금의 발산교가 만들어지면서 그 쓰임이 줄었고, 1975년 폭우에 교량이 떠내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2023년에 48년 만에 재건되었다.

1970년대에 세운 '밋밋교' 또는 '미밋교'라고 부르던 방림동 뽕뽕다리 모습과 현재 모습들(사진제공 광주광역시시청각자료실)

방림동의 뽕뽕다리는 남구 방림동과 학동 사이에 있었는데, 1986년에 남구 방림교와 2004년에 학림교가 가설되고 기능을 대신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주민들이 뽕뽕다리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청원하자 학동에 자리한 뽕뽕다리를 광주광역시 남구청에서 2017년 재건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 3월 7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1981년 광주로 고교 진학을 하면서 신안동 자취집에 바로 가려면 하천(용봉천)에 있는 '뽕뽕다리'가 있어 건너 다녔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2023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임동 '뽕뽕다리'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은 우리가 보았던 뽕뽕다리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한 철구조물 같다는 느낌이 앞선다. 최소한 조금만 탁 트인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든다.
광주천의 다리들은 광주천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광주천의 다리들은 광주 지역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광주천의 근대 다리들은 근대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 참고문헌
1. 박선홍, [광주 1백년 3], 광주문화재, 2015.
2. 조광철, [광주천의 다리], 제1차 광주학 콜로키움, 2017.
3.조광철, [광주 갈피갈피, 광주천의 이름들], 광주드림, 2022.
4. 강기정,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광주광역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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