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와 시민이 함께하는 광주공원 지킴이 활동

광주공원이 품은 역사와 의로움이 깃든 공원
성거사 터 5층 석탑의 비밀과 사적비군
광주목의 관영 누각으로서 정무를 보는 관아 건물이었던 "희경루"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3.08.24 12:35 의견 0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의 전몰 호국용사를 기리기 위한 22m 높이 현충탑 앞에서 단체기념사진(사진촬영 고경님)



대동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와 광주시민이 함께하는 문화재지킴이 활동장소는 광주시의 제1호 공원인 광주공원이 광주시민의 삶과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간임을 되새기고, 우리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의의를 갖는다. 또한, 시민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자발적인 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활동에 참석한 문화재지도사회 회원, 대학생, 시민들은 광주공원의 역사와 의로움이 서려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공원 내의 문화재를 보호하고 정화하는 활동을 통해 우리 지역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대동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 고경님 회장은 앞으로도 광주시민과 함께 다양한 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대동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와 광주시민이 함께하는 문화재지킴이 활동 참가자 모습들 ...

대동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 고경님 회장님 참석자 환영인사와 문화재지킴이지도사 회원들 광주시민들에게 광주공원에 대한 해설하는 모습들...



▶ 광주공원이 품은 역사

광주 최초의 공원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성거산에 조성된 남구 구동에 위치한 광주공원이다. 이곳을 오늘날은 광주공원이라 부르지만 본래 거북형국의 산으로 거북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 등에 5층탑(보물 제109호)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이 때문에 이 산을 성구강(聖龜岡)이라고도 불렀다.


일제는 성거산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일본의 개국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위패를 봉안한 광주신사를 세웠는데 지금의 광주공원 정상부에 세워진 현충탑 자리이다. 이 산에 일본인 번영회가 주최가 되어 신사를 짓고 천변에서 광장에 이르는 층계 계단을 만든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도착하는 입구에 신사를 상징하는 문 도리이(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 문)를 세우고 오늘 현충탑 자리에 본전과 배전 등 2개 동의 신사를 지었다. 이후 광주공원은 일본인들의 차지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 1929년 11월 3일, 일본 학생들이 참배한 곳도 이곳 광주공원의 신사였다. 1940년 광주공원을 대대적으로 개수하면서 거북 등허리를 파헤치고 원형을 많이 망쳐놓았다. 그리고 각 도와 일본의 각 지방은 물론 멀리 몽골·만주·대만·남태평양 등 아시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옮겨 심는다. 한때 광주공원은 희귀 나무가 밀집하여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신사가 헐린다. 그리고 1963년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22m 높이의 현충탑이다.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의 전몰 호국용사 15,867명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그리고 2015년 현충탑은 현재의 모습으로 새 단장을 한다. 일제의 잔재를 헐어낸 후 많은 시설물들이 공원 곳곳을 채웠다. 현재의 광주공원은 일제의 잔재를 헐어내고 닦아내었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그 흔적이 묻어 있는것 같다.

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 박미경회원 5.18해설과 정화활동 중인 대학생들...



▶ 의로움의 정신이 깃든 광주공원

광주공원은 광주광역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공원으로, 성거산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광주공원은 일제강점기부터 5·18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역사와 함께 해온 장소로, 의로움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불린다. 광주공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일제는 1914년 광주공원 정상에 신사를 세우고, 1921년에는 일본군 병사들을 위한 충혼탑을 건립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1919년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일으켰고, 광주공원은 이러한 항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광주를 포함한 전라도는 의로움의 고장, 의향이라 불린다, 이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음과 관련이 있다. 1909년 전라도 의병들의 교전 횟수의 47.3%(820회)가, 그리고 교전 의병 수의 60.1%(23,155명)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고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광주를 비롯한 남도는 한말 의병의 격전지가 아닌 곳이 없다. 광주향교는 1896년 기우만 의병부대의 집결지였으며, 광주공원 옆에 광주천 서천교 밑은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된 장소였다.

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 김오현회원의 성거산 유래와 안중근 의사 승모비가 세워졌던 지점에서 참가자들에게 설명하는 모습들...



◾️서당 훈장이 의병을 일으키다

광주공원 현충탑에서 5층석탑 쪽으로 가는 오른쪽에 호남 제일의 의병장이었던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沈南一 義兵將)을 기리는 ‘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가 서 있다. 의병장 심남일(1871년~1910년)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며 호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을 담아 지은 남일은 호이다. 1907년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해체되자 1908년 잔여 병력을 모아 대장이 된 후 함평을 근거지로 나주, 영암, 무안, 강진 등 전남 서남부 지역을 장악하며 일제 및 일제의 앞잡이를 응징했다. 1909년 9월부터 실시된 일제의 전라도 의병 격살 작전이었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때 체포된 후 이듬해 대구감옥에서 순국한다.


함평 출신인 그의 순절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진 연유는 더욱더 감동적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어 국가 유공자가 되자, 그 며느리는 꼬박꼬박 받은 연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후 광주 향교로 가져온다. 이에 감동받은 유림들이 돈을 보태서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를 광주공원에 세우게 된 이유이다.

문화재지킴이지도사회 박미경회원의 광주공원 나무들 이야기에 집중하는 참가들...



◾️ 광주공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훈련장이자 시민군 편성지

광주공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훈련장이자 시민군 편성지였다. 5월 21일 전남 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자위수단으로 인근 시군지역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 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지도부가 결성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 시내를 순찰하고 시민군 차량에 번호를 써서 등록하는 등 치안 업무를 맡는다. 공원 입구 계단을 오르다 해태상을 지나면 당시의 모습을 기리는 5·18 사적지 표지석이 서 있다.


이처럼 광주공원은 광주의 역사와 함께 해온 장소로, 의로움의 정신이 깃든 장소로, 광주 시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광주공원의 이곳저곳을 돌면서 정화활동과 숨은 의로움이 깃든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들...



▶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의 비밀

종 목 : 보물(제109호)
명 칭 :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서오층석탑2길 17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기단을 1단만 두는 고려시대로의 양식변화를 보여준다. 또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1층 몸돌에서 나타난다. 즉, 몸돌 전체를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또한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아래위 모두 약간씩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1961년 해체하여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사리갖춤은 큰 건물 모양으로 뚜껑과 받침, 은제 사리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예술적 조형미와 구성이 돋보이는 고려 전기의 대표작이자, 우리 고장의 불교 공예 수준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성거사 터 5층 석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앞에서 단체기념사진(사진촬영 고경님)


고려 시기, 광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라 말 무등산 자락에 영향을 미친 선종이 풍수지리설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성거사 터에 남아 전하는 5층석탑의 건립 비밀이 잘 말해준다. 전설에 의하면, 성거산이 거북 모양이므로 상서로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지을 때마다 무너져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거북의 목 부근에 탑을 세우면 절이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도승의 말을 따라 거북의 급소인 목에 5층석탑을 세우고 거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절을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광주공원이 된 성거산은 거북이가 광주천 물줄기를 향해 헤어치는 형국이다. 안중근 의사 승모비가 세워졌던 지점의 바위산이 거북의 머리이고, 5층석탑의 자리는 거북의 목이며, 지금 현충탑이 서 있는 자리는 거북의 등에 해당한다. 빛고을문화커뮤니티(옛 구동 체육관) 입구가 오른쪽 앞발, 어린이 놀이터 자리가 오른쪽 뒷발, 서동과 사진공원을 잇는 도로가 꼬리, 광주 향교의 오른쪽 서동이 왼쪽 발, 광산대 광주지대(옛 활터)의 구릉이 왼쪽 앞발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 거북의 옛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40년, 일제가 그들의 신사를 개수하면서 등허리를 파헤치고 길을 내어 발을 끊는 등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광주는 지금 거북의 자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북서진하고 있으며 멀리 첨단지구의 발전이 눈부시다. 해방 직후 8만이던 인구는 이제 150만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고 전설대로라면 거북을 붙잡아 둔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와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 및 목사·군수·찰방 등을 기리는 다수의 비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 광주공원의 사적비군

향교에서 공원으로 오르는 길목에 광주공원 사적비 군이 있다. 이 비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시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것들을 모아 1957년 광주공원 입구로 옮겼다가, 1965년 다시 현 위치로 옮겨진다.


이곳에는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와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 및 목사·군수·찰방 등을 기리는 다수의 비들이 모여져 있다. 사적비군 중 단연 눈에 띈 것은 도원수 권율(權慄, 1537년~1599년)을 기리는 비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은 곧바로 광주 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그는 광주 의병과 관군을 거느리고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이끄는 부대의 중의장이 되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진했으며, 이후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승리로 이끈다. 바다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도원수 권율이 있었던 셈이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일궈 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그가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출병한 곳이 바로 광주였다. 그를 기리는 창의비가 광주에 세워진 이유다.


조선시대 광주는 목사가 파견되어 다스리는 지역이었지만 간혹 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다수의 목사 선정비와 함께 군수 불망비가 함께 있는 이유다. 경양역의 역장인 종6품 찰방을 기리는 비도 4개나 남아 있다. 당시 광주에 있던 경양역은 북구 우산동에 위치했다. 역은 공문서 수발과 관리들의 여행 때 숙식을 제공하고 말을 공금하던 병부의 소속기관이었다.


1896년 전라도가 전라 남·북도로 나뉠 때 초대와 4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역임한 윤웅렬(尹雄烈)은 기르는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윤웅렬(尹雄烈, 1840년~1911년)은 철종 7년(1856년)에 무과에 급제한 조선 말기의 무신이며 군인이다. 제2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1884년 갑신정변에도 가담하였으며, 갑오개혁 당시 경무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법부대신, 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지낸 후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군인이면서 개화파였고 애국계몽가였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것은 그가 죽기 1년 전, 일제가 준 남작의 작위였다. 그는 살아생전 꽤 유명한 개화파 인물이었지만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영원한 친일파가 되었다, 그의 친일 행적이 더욱 부각되었던 것은 그의 아들 윤치호(尹致昊)의 대를 이은 친일행위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후 조선지원병후원회 등 친일단체의 핵심인물로 활동한다.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선행을 베풀고, 의로운 일을 한 분들이 받아야 할 선정비(善政碑), 공덕불망비(功德不忘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의적비(義積碑)등이 이에 상응하는 인물들이 받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광주에는 이 비들 말고도 정말 가슴 따뜻한 비가 하나 있다.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朴浩連)을 기리는 비가 그것이다. 그는 당시 천한 일이었던 나루터 뱃사공이 그의 몫이 된다. 1920년대 중반, 그는 제법 큰 재산을 모은다. 뱃삯으로 받은 돈을 반은 농사로, 반은 상업으로 불린다. 흔히 젊어 고생하면 나이 들어 인색해진다고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뱃사공 박호련은 보릿고개 때마다 곡식을 풀어 굶주린 이웃을 구제한다. 서창면민들도 그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1925년에 이어 1929년, 서창면 주민들은 그의 두 번째 불방비를 세운다. 그리고 그의 대가 없는 선행은 <중앙일보> 1930년 1월 22일자신문에 실린다. 그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에 의미를 일깨워준다

마무리 공사가 한참인 희경루, 현충탑 참배, 광주공원입구에서 기념 단체기념사진



▶ 희경루(喜慶樓)

희경루는 1451년(문종 원년)에 지은 관영 누각이다. 광주목은 1430년(세종 12년)에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복호되었는데,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완공되자 희경루로 명명하였다. 강등과 복호, 희경루 명명은 긴 사연이 있다. 세종 12년(1430) 광주읍민 노흥준이 애첩을 간통한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으로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 되었다. 이 강등은 1420년(세종 2년)에 제정된 ‘부민고소금지법’의 시행세칙으로 1429년(세종 11년)에 수교가 확정되는데 광주 강등이 첫 사례로 광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 처음으로 겪은 강등 조치였고 계수관마저 장흥도호부에 내주고 말아서이다. 계수관은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행정기구로서 도의 지시를 관할하는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하기도 하였다. 광주 읍호강등은 수교 반포 이래 처음 적용되어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광주가 사례로 언급되었다. 더군다나 “사건의 발단이 애매하여 위로는 산천의 귀신과 아래로는 향촌의 부로와 아이들까지 모두 억울함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능히 그 일을 호소하지 못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는 기록처럼 읍호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여름에 순성군 이개(李?, ?~1462년, 양녕대군 아들), 이조판서 권맹손(權孟孫, 1390년~1456년), 인순부윤 김청(金聽, ?~1462년), 예문 제학 이선제(李先齊, 1390년~1453년) 등이 논의 하였고, 필문 이선제가 중심 된다. 이개와 좌의정 황보인 등은 “토지의 광대함과 인물의 번창함이 서남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서 실로 전라도의 한 도회소(都會所)”로 “구호(舊號)로 회복하도록 허가하여 경신(更新)할 길을 열어 주소서."라 상언한다. 이같은 노력으로 6월 7일에 광주목으로 복호된다. 이때에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낙성되니 고을의 어른들이 광주목사로 부임한 안철석(安哲石)에게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함희상경(咸喜相慶)”의 뜻을 담아 “희경(喜慶)”으로 누의 이름을 지어 이 기쁨을 기념하고자 청하였다. 이에 따라 “희경루(喜慶樓)”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571년 7월 28일 포폄(조선 시대에 관료의 근무성적을 평가한 뒤, 그 결과에 따라 포상이나 징계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정사는 희경루에서, 7월 29일의 평가는 동헌에서 이루어짐을 보았다. 이렇듯 희경루는 광주목의 관영 누각으로서 정무를 보는 관아 건물이다. 일반적인 민간 누정의 제영풍류와는 구분되는 기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영 건조물의 외형으로서만 아니라, 그 공간과 관련된 역사 문화 관련 사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광주광역시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희경루를 중건하기 위해 2009년부터 기본계획을 수립, 중건 사업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희경루는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충장로 광주우체국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이 일대가 중심상권이고 사유지가 대부분이어서 부득이 광주공원으로 터를 옮겨 2018년부터 광주공원 일원에 정면 5칸ㆍ측면 4칸ㆍ팔작지붕ㆍ중층누각 형태의 희경루 복원공사를 진행하여 현재는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 세종때 강등된 광주목이 문종 원년 다시 복구된 기념으로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답게 광주를 대표하는 역사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래본다.

마무리 공사 중인 희경루 전경



🔳 참고문현

1. 박선홍, [광주 1백년 3], 광주문화재단, 2015.
2. 구용기, [광주문화원형을 품은 사직골을 거닐다], 꿈꾸는 거북이, 2016.
3. 김덕진, [사이버광주읍성 공간], 광주역사문화자원 스토리텔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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