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들의 절의와 국난극복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건립한 병천사(秉天祠)을 찾아서 - 2탄
충주지씨 선조들과 더불어 고려말 충신 정몽주와 조선 인조 때 공신 정충신을 배향한 사우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충신이며 송시열의 외조부 지여해
▶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한 충주지씨 인물들
병천사(秉天祠)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당한 뒤 선현들의 절의와 국난극복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지방의 대부호였던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1868~1957)이 1924년에 건립했다. 충주지씨 선조인 지용기(池湧奇), 지여해(池汝海), 지계최(池繼漼) 등을 모시고 있으며, 특히 유림에서 인정받는 사우 건립의 명분에 맞추기 위해 자신이 존경하는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와 광주 출신 인조때의 공신 금남군 정충신(錦南君 鄭忠信, 1576~1636) 등의 다섯분을 배향한 사우이다. 여기에서는 병천사의 충주지씨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의재 지용기(毅齋 池湧奇, 1330~1392)
고려 말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충주(지경의17세손)이다. 공민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고, 우왕때에 예의판서가 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었고, 1382년 양광전라경상도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왜구를 쳤다.
1388년에 요동 정벌(遼東 征伐)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1391년 부인 서씨의 친정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스스로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가 이를 입수하고는 지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꾸몄다고 고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충청도 목천으로 이배되었다. 1392년 충청도 목천의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지용기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당 현종 때인 755년에 안사의 난 진압 )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철산(鐵山) 지여해(池汝海, 1591 ~ 1636)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수지(受之)이다. 고려의 명장 충의군(忠義君) 용기(湧奇)의 8대손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외조부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寧邊通判)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雲山)의 적군을 기습하여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왕을 선봉에서 인도한 후, 전투를 자청하여 체찰사 김류(金瑬)의 비장(裨將)으로서 어영포수(御營砲手)200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분전(奮戰)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贈職)되었다. 공은 고령박씨 찰방 박순성의 딸이자 예조 정량 박세호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낳지 못하고 3녀를 낳았다. 큰딸이 은진송씨 안소당공파의 파시조인 송국헌에게 시집을 가서 후손을 번성시켰으며, 은진송씨 안소당공파 후손이였던 우암 송시열이 장군 묘소의 묘표를 쓰기도 하였다.
◾️표곡(豹谷) 지계최(池繼崔, 1594 ~ 1637)
고려의 명장 충의군(忠義君) 용기(湧奇)의 10대손으로, 30세인 1623년(인조 1)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의병 800명을 이끌고 가서 그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그의 친구 강적(姜適)을 보내어 난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적의 목을 벤 다음 부하를 거느리고 서울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이 일어나 왕은 남행(南幸)한 뒤였다. 그는 군사를 사현(沙峴,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에 있는 고개)에 주둔시켰다가 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이수일(李守一) 등과 더불어 난군을 맞아 싸워서 적을 섬멸시켰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이 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14) 김자점(金自點)이 원수가 되고 그 휘하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는데,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서흥 검수참(劍水站)에서 맞아 싸워 수백명의 적을 베고 용전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 팔뚝이 부러졌으므로 더 싸울 수가 없었다. 부하군사를 원수에게 부속시키고 편비(褊裨, 각 군영에 둔 부장) 수백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리다가 신계(新溪) 서목촌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칼을 빼어 자진 순절하니 곧 인조 15년(1637년)1월 4일 향년 44세이였다. 뒤에 한성판윤에 추증되고, 또한 충성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표곡실기(豹谷實紀)가 있다.
병천사의 이름은 "천리(天理)를 병집(秉執)한다"는 뜻으로, 이 사당에 모신 5인의 선현들이 모두 천리에 따라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병천사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지응현(池應鉉, 충주지씨 충성군 계최의 10대손)이 건립한 것으로, 충주 지씨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입니다. 결론적으로, 지응현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주지씨의 선조인 지용기, 지여해, 지계최 등을 모시고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며, 또한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광주 출신 정충신을 배향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 참고문현
1. 김용철, [병천사-디지털광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2.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3.
3. 지형수, [충주지씨 대동보], 충주지씨대종회 홈페이지 , 2023.
#병천사 #지응현 #정몽주 #지용기 #정충신 #지여해 #지계채 #기아문화재지킴이 #김오현선임기자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