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덕성을 키운 곳, 광주향교(光州鄕校)

- 광주공원에서 옛 모습을 가장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광주향교'
- 향교는 인재를 키웠던 교육공간과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던 제향의 공간으로 구성됨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5.18 07:06 의견 1

지킴이 활동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광주향교를 설명하는 기아국가유산지킴이 김오현(사진촬영 신순례)

이 지방의 교육도량인 광주 향교는 옛날 서석산(瑞石山) 현 무등산 서쪽 장원봉(壯元峰)아래에 세워졌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성(城)의 동문(東門)안으로 옮겨 지었다.

그러나 1488년(성종 19년) 홍수로 수해를 입게 되어 광주목사 권수평(權守平)이 지금의 구동으로 옮겨 지었다. 그 후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적(倭賊)들에 의하여 불에 타 1600년(선조 33년)에 관(官)과 백성들이 협력하여 다시 세우고 그 뒤 수차례의 보수(補修)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충효교육관 쪽에서 바라본 광주향교 전경과 명륜당 모습(사진촬영 김낙현)

조선시대의 학교 광주향교(光州鄕校)

종 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명 칭 광주향교
지정일 1985.02.25
소재지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2번지

향교(鄕校)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 인재교육을 위해 세운 공립 학교이다.

물론 향교에는 유교의 아버지라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를 모신 문묘를 필수시설로 갖추고 있는데 갑오경장 이후 새 학제가 시행되면서 향교에는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만 남기고 학교기능은 없어졌다.
조선시대 학교로는 오늘날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서울의 4부 학당(學堂) 및 지방의 향교(鄕校)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1읍 1교 원칙에 의거하여 향교를 세우도록 명을 내렸고, 태종(太宗)은 학전(국가에서 내리는 땅)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하고 지방관의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정책을 폈다.

​​​향교가 바깥세상과 통하는 외삼문과 홍살문 그리고 출입문 주변 경관 모습

광주향교(光州鄕校)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처음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워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산천 항목에 보면 '장원봉은 무등산 지봉이다. 속설에 옛날에는 향교가 이 봉우리 아래 있었다. 장원봉이란 이름은 이 고을 사람들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아 붙여진 것이다' 는 설명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안에 향교가 있기 전 장원봉 기슭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장원봉 기슭에 있던 향교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향교로 짐작된다. 장원봉 아래에 세워졌던 향교는 호랑이의 잦은 출몰로 성의 동문 안(지금의 대인동)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성안에 자리 잡았던 향교는 지대가 낮고 좁으며 홍수로 수해를 입게 되어 건물이 기울어 거처 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밭을 사들이고 터를 정하여 읍(邑)의 서쪽 2리에 새로 터를 잡은 곳이 현재의 위치인 남구 구동 22번지인 광주공원 자락이다.

오늘날 구동에 있는 광주향교는 《광주읍지》에 있는 성현(成俔, 1439~1504)의 기문으로 보아 1488년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수평(權守平)이 새로 지었다. 1563년에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쓴 흥학비(興學碑) 비문을 보면 읍성 안에 있던 향교를 중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광주향교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전소되고 만다. 1600년(선조 33년)에 다시 관아와 광주 백성들이 협력하여 다시 세웠지만, 1841년 또 화재가 나서 명륜당과 동재ㆍ서재가 불에 탄다. 이 해에 부임한 목사 조철영(趙徹永)이 다시 짓고, 이후 여러 번의 수리와 재건축이 이루어져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광주향교의 문회재, 동재, 서재, 행단 등의 모습
(사진촬영 박정세)

광주향교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하마비(下馬碑)와 비각(碑刻)이다. 하마비(下馬碑)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릴 위치를 표시한 비다.

공자님이 계신 곳이니 오만함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에 향교의 건립 및 이전, 건물들의 신축과 보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모아 관리하는 건물이 있다. '광주향교'란 이름표가 붙은 외삼문(外三門)이 향교가 바깥세상과 통하는 문, 즉 출입구에 해당하고 외삼문에 들어서면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는 학교 공간이다. 학교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건물 중 대표 건물은 '인륜을 밝히는 집'이란 뜻의 명륜당(明倫堂)이다. 동쪽에 있는 집이란 뜻의 동재(東齋)는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였고, 서쪽에 있는 집이란 뜻을 지닌 서재(西齋)는 평민 자제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였다.

향교는 양인 이상이면 모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거처하는 곳은 이처럼 신분에 따라 달랐다. 서재(西齋) 뒤편 건물이 문회재(文會齋)다. 문회재(文會齋)는 학문을 하기 위해 모이는 집이라는 뜻인데, 사마재(司馬齋)라고도 부른다. 과거 1차 합격생인 생원.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 지금의 대학에 해당한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2019년 국가유산지킴이 위촉교육 장면과 단체 기념사진(사진촬영 오현)

선비를 양성하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양사재(養士齋)는 육영재(育英齋)라고도 부른다.

영재 40명을 선발하여 과거시험을 준비시키던 일종의 입시학원이었다. 내삼문(內三門)을 통하면 바로 제향의 공간인 사당이 나온다. 따라서 내삼문은 학교와 사당을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 제향 공간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ㆍ서무(西廡)가 있는데 중심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이다. 공자(孔子)님의 궁전이란 뜻의 대성전(大成殿)에는 중앙에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자(顔子)자사자(子思子), 서쪽에 증자(曾子)맹자(孟子)가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송나라 2현(賢, 정호와 주희)와 설총, 최치원, 안향, 이황, 김인후 등 우리나라 성현(聖賢) 18현(賢) 등 총 25성현(聖賢)을 모시고 있고,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釋奠大祭)라는 제사를 드린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에 비해 격이 낮은 건물로 동쪽과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이다. 1951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1951년 성균관에서 "대성전(大成殿)에 중국의 유학자를 모시고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격이 낮은 곳인 동무(東廡)ㆍ서무(西廡)에 모시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다."라고 결의하여 위패(位牌)가 공자가 있는 대성전(大成殿)으로 우리나라18현도 대성전(大成殿)으로 옮겨졌다.
오늘날의 광주향교에서는 선현에 대한 제사와 전통혼례, 서당체험, 유학대학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밖의 유림회관(儒林會館),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등도 운영되고 있다.

현재 광주공원의 어린이헌장탑과 옛 사마재 터 앞에서 설명하는 기아국가유산지킴이 김오현

사립(私立) 중등(中等) 교육기관(敎育機關) 서원(書院)

향교(鄕校)가 관학이라면 16세기 후반부터 사림들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한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은 사학이다.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강학 장소인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지만, 서원은 강학은 물론이고 선현을 봉사하는 사당을 가지고 있는 점이 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 백운동서원은 명종 5년(1550) 퇴계 이황(李滉)의 요구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으며 사액서원이 된다. 서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우수 교원이 부임하면서 향교보다는 서원으로 학생들이 몰리게 된다.
향교와 서원은 교육 기능과 선현에 대한 제사 및 지방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향교와 서원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설립 주체가 향교는 국가이고 서원은 개인이다. 향교는 도시중심부에 위치했지만 서원은 경치 좋은 외곽에 위치했다. 향교 학생들이 제사 지내는 멘토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과 한국의 18현으로 모두 똑같았지만, 서원은 모두 한국인 이었고 서원마다 제사 지
내는 대상이 달랐다. 향교의 교수진이 과거 급제자이거나 중앙 관리임에 반해 서원은 유명한 학자나 양반들이었다. 향교는 평민이나 양반 모두 입학 자격이 있었지만 서원은 양반 자제만 입학이 가능했다.
조선 전기, 광주의 교육은 관학인 향교가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중기 이후가 되면 서원이 교육의 중심이 된다. 15~17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광주읍지》에 보면 광주 지방의 교육을 주도했던 학교로는 관학인 향교를 비롯. 사학인 월봉서원(月峯書院, 1578년)과 포충사(褒忠祠, 1601년), 벽진서원(碧津書院, 1602년) 등이 있었다. 월봉서원(月峯書院)은 기대승(奇大升)을, 포충사(褒忠祠)고경명(高敬命)을 그리고 벽진서원(碧津書院)은 박광옥(朴光玉) 등을 기리는 당대 최고의 사립학교였다.
이 외에도 광주광역시에는 무양서원, 운암서원, 유애서원 등 다양한 서원들이 있다.

​​​광주향교의 비각 안의 비석들 주위를 청소하는 광주문화유산지킴이들과 비각 전경

광주향교(光州鄕校) 부지는 원래 광주공원 일대에 걸친 넓은 땅으로 모두 향교 재산이었는데 일제 때 이곳에 광주신사(光州神社)를 짓는 바람에 많이 줄어들어 현재는 1,582평이다. 광주향교는 전통적인 유교의 전당으로서 뿐만 아니라 1906년 11월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광주공립보통학교가 바로 이곳 사마재(司馬齋)에서 개교한 유서 깊은 곳이다. 광주향교(光州鄕校)는 1986년 10월 24일 지방문화재 제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봄.가을의 제사를 모시는 일 말고도 전통혼례의 예식장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예절 및 한문교육의 도량으로 활용되는 등 청소년들의 윤리교육과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 일에 힘쓰고 있다.

광주향교의 비각주변 정화활동과 모니터링을 하는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과 광주시민들..

🔳 참고문헌

1.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2014.
2. 김정호, [광주산책 상],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2014.
3. 박선홍, [광주 1백년 3],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2015.
4.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국가유산청,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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