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 전에 윤효정이 아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와 녹우당 일원의 전경(사진제공 네이버검색, 김오현)
고려 말까지 해남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던 해남윤씨(海南尹氏)는 어초은 윤효정(漁憔隱 尹孝貞)이 해남의 거부 해남정씨(海南鄭氏) 정귀영(鄭貴瑛)의 사위가 되면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혼맥과 관직 진출이라는 당시 사족 성장의 주요 경로를 발판 삼아, 윤효정(尹孝貞)은 세 아들을 모두 문과에 급제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특히 큰아들 윤구(尹衢)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이름을 날렸고, 다른 두 아들 또한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해남윤씨를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후 윤선도(尹善道)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해남윤씨는 16세기 사림정치기를 거치며 지역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위의 왼쪽부터 녹우당 일원의 어초은 윤효정선생의 묘,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500여 전 덕음산 중턱에 조성된 400여 그루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숲
▶ 해남윤씨(海南尹氏), 윤효정(尹孝貞)으로부터 시작된 명문가(名門家)의 역사
어초은 윤효정(漁憔隱 尹孝貞)은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에서 윤경(尹耕)의 막내 아들로 살았으나, 해남의 거부이자 향족(鄕族)인 해남정씨(海南鄭氏)의 정귀영(鄭貴瑛)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 정착하여 살게 된다. 고려 말까지 해남 지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해남윤씨(海南尹氏)가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윤효정(尹孝貞)이 해남정씨(海南鄭氏) 정귀영(鄭貴瑛)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당시 재지사족(在地士族, 조선 시대에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 계층을 이르던 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들 사족 집안과의 혼맥(婚脈)과 관직 진출이었다. 윤효정(尹孝貞)은 해남정씨와 혼인하여 부를 축적하고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의 제자가 됨으로써 이후 아들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여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해남 해촌서원(海村書院)의 전경과 육현사(六賢祠)의 정면 모습
조선의 '천재 시인' 고산 윤선도 영정과 조선 사실주의의 선구자, 국보 공재 윤두서 자화상
조선 사회에서 가장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인데, 윤효정(尹孝貞)은 세 아들을 모두 문과에 급제시킴으로써 일시에 집안의 기틀을 다져 나간다. 큰아들 윤구(尹衢, 1495~1549)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부교리를 지내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영암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며, 해남육현(海南六賢)의 한 사람으로 해촌사(海村祠)에 배향되어 있다. 윤구(尹衢)는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유성춘(柳成春, 1495~1522)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불렸다. 동생인 윤행(尹行, 1508~1592)도 문과에 급제한 후 동래부사와 나주목사, 광주목사 등 여덟 주의 목사를 지냈고 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또한 윤복(尹復, 1512~1577)도 1538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이들 삼형제로 인해 더욱 빛을 보게 된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그 후에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지낸 윤의중(尹毅中, 1524~1590)과 평안도사와 공조좌랑을 지낸 윤광계(尹光啓, 1559~ 1619) 등 여러 인물을 배출한다. 또한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윤선도(尹善道)는 국문학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해남윤씨(海南尹氏) 가운데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남윤씨(海南尹氏)는 이처럼 윤효정(尹孝貞)이 해남에 정착한 이후 16세기 사림정치기를 통해 많은 인물들이 관직에 진출함과 아울러 경제적 기반도 착실히 다져 해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명문 양반가로 성장한다.
녹우당 일원의 사랑채, 안채, 주번 돌담의 모습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려 말까지 해남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문이었으나, 윤효정(尹孝貞)이 해남정씨(海南鄭氏)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해남에 정착하면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윤효정(尹孝貞)의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면서 가문의 기반을 닦았고, 특히 큰아들 윤구(尹衢)는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이름을 날리며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 윤선도(尹善道)와 윤두서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해남윤씨(海南尹氏)는 16세기 사림정치기를 거치면서 혼맥과 관직 진출을 통해 해남 지역의 명문가(名門家)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위의 왼쪽부터 녹우당 일원의 고산 윤선도유물 전시관, 서당 자리에 들어선 매표소, 백련지, 추원당
🔳 참고문헌
1. 정윤섭, [녹우당, 천문과 풍수 녹아든 최고 길지], 오마이뉴스, 2006.
2. 화산, [해남윤씨 윤선도가 살았던 녹우당 해송림], 네이버블로그 '화산의 정원문화 연구소', 2017.
3. 안지숙, [아침숲길, 마음무덤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4.
4. 윤춘식,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는 녹우당의 전인교육적 가치], 돌(덕)고개 연꽃농장,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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