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조일전쟁의 위기 속에서 지켜낸 풍영정(風詠亭)의 이야기

- 무주 구천동에 있는 갈처사에게 13번이나 청한 끝에 비로소 받은 현판 풍영정(風詠亭)
- 신비로운 전설 속 풍영정(風詠亭) 현판 글씨의 비밀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7.06 07:21 | 최종 수정 2024.08.22 22:10 의견 0

풍영정(風詠亭) 현판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언거선생, 갈처사, '풍(風)'자가 오리로 변한 내용을 한그림으로 표현한 사진(사진 편집 김오현)

풍영정(風詠亭)은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당시 이곳에는 풍영정 외에도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머지 정자들은 임진왜란 때 화마를 입어 없어지고 풍영정만 남아 있다. 불을 이겨낸 풍영정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서는 풍영정(風詠亭) 현판의 '풍(風)'자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풍영정 전경과 주변 풍광(사진촬영 김낙현)


▶ 풍영정(風詠亭)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
명 칭 풍영정(風詠亭)
지정일 1984. 02. 29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길 39-3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風詠亭)은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1560년(명종 15)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내려와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명칭은 『논어(論語)』의 ‘풍우영귀(風雩詠歸)’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을 벗삼아 심신을 다스리겠다.'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안쪽에는 한석봉(韓石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898년(고종 35)에 중수되었고, 이때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중수기(重修記)를 썼다. 풍영정(風詠亭)은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풍영정 내부의 ‘제일호산(第一湖山)’ 현판 당대 명필 한석봉 선생의 글씨와 수많은 편액들의 모습

홍문관교리(정5품)를 거쳐 승문원판교(정3품)를 역임했던 김언거(金彦据)의 담박한 성정, 학문에 대한 열정, 풍류와 시문에 대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남명 조식(南冥 曺植),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등 이곳에 시문을 남긴 이들의 면면만 봐도 풍영정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능할 수 있다. 극락강(極樂江)과 선창산(仙滄山)의 아름다운 풍경과 넓은 들녘에서 넘실대는 황금물결의 넉넉한 인심은 수많은 '풍류처사(風流處士)'들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명류(名流)들의 왕래는 자연스럽게 많은 시문을 낳았고 그 흔적들이 지금까지도 오롯이 남아 풍영정(風詠亭)을 빛낼 역사의 발자취가 될 것이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과 광주광역시 해설사 선생님과 풍영정을 살펴보고 기념사진(사진촬영 오현)


▶ 풍영정(風詠亭)에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풍영정(風詠亭)과 갈처사(葛處士)

풍영정(風詠亭)은 김언거(金彦据)가 1560년 퇴임 후 이곳에 정자를 짓자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明宗)은 정자의 현판 글씨를 전라도 무주 구천동에 기거하는 명인, '갈처사(葛處士)'에게 받아 가라고 권한다. 김언거(金彦据)는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葛處士)를 찾아갔으나 여러 번 헛걸음을 하였고 열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葛處士)는 칡넝쿨로 만든 붓으로 글을 써주며 가는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김언거(金彦据)는 자꾸만 펴보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어서 종이를 펼쳤는데, 그 순간 '풍(風)'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놀란 김언거(金彦据)는 돌아가 갈처사(葛處士)에게 다시 써줄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대신 그의 제자인 황처사(黃處士)에게 '풍(風)'자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風)' 자는 나머지 '영(詠)'과 '정(亭)' 자보다 자획(한자의 글자모양을 구성하는 점과 획)이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풍영정 현판을 얻기 위해 열세 번이나 찾아간 김언거 선생과 갈처사 이아기를 사진으로 편집함


◾️임진왜란때 바람과 함께 사라진 '風' 자

1560년(명종 15)에 그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이들이 서로 정자를 지어주겠다고 나섰으며, 그 바람에 이 일대에는 모두 12채의 정자가 들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모두 불에 타고 풍영정(風詠亭)만이 남아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왜인들이 정자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풍영정(風詠亭)의 '풍(風)'자가 바람에 날아가 오리가 되자 놀란 왜인이 불을 지르지 못해 정자가 보존이 됐다고한다. 글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당시 주변에는 지금의 풍영정(風詠亭)을 중심 정자로 하고 뒤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 마치 징검다리처럼 11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임란때 왜인들이 다른 11채의 집은 다 불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풍영정(風詠亭)에 불을 던지려던 찰나 현판에 새겨진 '풍(風)'자가 오리로 변해 극락강 쪽으로 날아갔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12개의 정자 중 풍영정(風詠亭) 하나만 남았다는 얘기다. 또 그때 오리가 되어 날아가 버린 풍자는 후대에 다시 써 넣었는데, 이로인해 다른 두 글자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이 풍영정 입구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


영산강 8경 중 7경에 해당하는 이곳 풍영정(風詠亭)에는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풍영정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풍영(風詠)'은 <논어>의 '선진(先進)'편에서 차용해왔다. '풍우영귀(風雩詠歸)',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정자를 지은 김언거가 평생 꿈꾸던 '이상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광주랑, [외로울땐 극락강 풍영정으로 간다], 광주광역시 공식 블로그, 2012.

2. 김윤기,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2019.

3. 염승연, [풍영정 유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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