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최부(崔溥)의 표류기(漂流記)를 세상에 알린 손자 유희춘(柳希春) - 1탄

- 외할아버지 최부(崔溥)가 쓴 글을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이 정리한 표해록(漂海錄)
- 536년전 중국(명나라) 대륙에 떨친 조선 선비 기개와 효행심이 지극했던 최부(崔溥)선생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9.08 22:23 의견 0

1488년(성종 19)에 최부선생이 지은 표해록 표지와 무안 느러지마을 벽화 그림(사진제공 네이버검색)

조선 1488년(성종 19), 젊은 선비 최부(崔溥)는 예상치 못한 풍랑에 휩쓸려 중국으로 표류하게 된다. 14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 대륙을 떠돌며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최부(崔溥)는 당시 명나라의 해안 방비 체계부터 정치, 운하, 지리, 민속, 언어,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다루고 있어, 마치 살아있는 역사서와 같다. 그러나 표해록(漂海錄)은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금서(禁書)로 남아 있다가 1569년(선조 2)에 외손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선생이 목판본을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표류기(漂流記)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진 책이다.

무안 느러지마을 벽화그림에 최부선생의 표해록 작성 모습과 귀환 지도

▶ 금남 최부(錦南 崔溥)선생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선생은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聖池)마을에서 태어났지만 1470년(성종 1) 17세에 해남정씨 훈련원 참군(參軍) 정귀함(鄭貴瑊)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482년(성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유(大儒)로 평가받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에게 수학하였으며, 삼괴당 신종호(三魁堂 申從濩, 신숙주의 손자),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등과 교유하였다. 이로서 최부(崔溥)는 사림의 계보 즉 영남사림의 맥을 이어받은 호남사림의 선도자가 되었다. 1482년(성종 13)에 과거 급제 후 군자감(종6품), 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교리(정5품),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시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던 제도) 등을 지냈다. 그리고 1485년(성종 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동국통감(東國通鑑)》편찬에 참여하였고, 1486년(성종 17)에는 김종직이 주도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1487년 제주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 돼 제주도로 건너갔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배로 고향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배에 탄 43명과 함께 14일 동안 표류하다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해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성종의 명으로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물며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한다.

전남 나주시 금남길 31-3 (금계동 74)의 최부선생의 생가터 모습


1498년 7월 무오사화(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어 6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04년 10월 갑자사화(연산군 10년에 폐비 윤씨와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 때 참형을 당할 때 향년 51세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중종(中宗)은 최부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하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자리한 무양서원(武陽書院)과 해남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돼 있는데, 탐진 최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최부선생이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가기위해 출발한 해남 관두량 포구와 무안 늘어지 마을의 최부선생 묘지

▶ 표해록(漂海錄)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으뜸으로 꼽히는 표해록(漂海錄)은 나주 동강(羅州 洞江)이 낳은 최부(崔溥) 선생께서 지으셨다. 536년전 중국(명나라) 대륙에 떨친 조선 선비 기개(氣槪)와 효행심(孝行心)이 지극했던 선생이다. 1488년(성종 19)에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곤욕을 치르고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왜구로 오인 받아 죽음직전까지 갔으나 뛰어난 필담으로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영파-소흥-항주-소주-양주를 거쳐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148일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행적을 ‘출항 - 표류 - 귀국’이라는 시간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전남 나주시 동강면 느러지 전망대에 세워진 '표해록 따라 걷는 곡강, 최부 길' 표지석과 최부선생이 이동한 경로 지도석

표해록(漂海錄)은 최부가 표류하면서 겪은 운명적인 순간, 위기의 상황에서 직면하는 일행과의 갈등, 그리고 거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간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의 어려움과 하늘의 도움을 바라는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적재적소(適材適所)에서 발동하는 지혜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도 15세기 중국의 정치, 언어, 연안의 해로(海路)나 기후(氣候), 풍속(風俗) 등을 연구하는데 더 없이 요긴한 자료들을 망라하고 있다.

느러지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과 세계 3대 중국 기행문들의 표지


표해록(漂海錄)은 원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으로 한문 필사본(筆寫本)이었는데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금서로 남아 있다가 1569년(선조 2)에 외손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선생이 목판본(木版本)을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진 책이다. 도쿠가와시대(徳川時代)에는 여러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었으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번역본까지 간행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1965년에 존 메스킬(John Meskill)에 의해 영어번역본이, 한국은 1979년 최기홍 선생에 의해 우리말 번역본이 발간되었다. 중국에서도 1992년 북경대학 갈진가(葛振家)교수의 소개로 《표해록》이 세상에 나왔다. 또 지난 2005년 강소성 무석시 석혜공원에는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를 건립한 바 있다. 현재 중국 지식인들이 한국인 중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첫 번째를 이순신 장군, 두 번째를 최부(崔溥) 선생이라고 꼽는다.

중국 절강성 임해시 문화유적지에 나주출신 금남최부선생 표해록 한중민간우호비가 세워진 전경


최부(崔溥)선생의 표해록(漂海錄)은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알린 하멜의 표류기(漂流記)보다 200년 정도 앞 선 표류기(漂流記)로 당시 명나라의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조선은 물론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표류기(漂流記)로 마르코폴로의《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이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자리한 무양서원을 방문하여 기념사진

🔳 참고문헌

1. 남창섭, [제주삼읍추쇄경차관 최부와 표해록의 현장], 인천일보, 2021.

2. 최도철, [조선 선비가 기록한 명나라 여정, 표류문학의 白眉 되다], 전남일보, 2022.

3. 김길남, [금남최부(해남읍지)], 네이버 블로그 '김선생의 광주사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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