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영웅 권율 장군의 업적 기리는 창의비, "미지정문화유산 현실 안타깝다"

- 1903년 세워진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 국가유산 등재 시급하다
- 120년 역사를 간직한 비석, 국가적 가치 인정받아야 할 때이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7.12 00:59 의견 0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 내 비석군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 모습(사진촬영 김오현)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權慄 將軍)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 내의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권율 장군(權慄 將軍)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정2품)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과 함께 육지는 권율(權慄), 바다는 이순신(李舜臣)이 지켰다고 할 만큼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903년(고종 40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대부분 우리 지역 출신으로, 권율 장군 (權慄 將軍) 휘하에서 활약했던 26명의 장수들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주공원 내 비석군 전경과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활동때 비석들을 설명하는 김오현 고문(사진촬영 구희장)

▶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

• 건립연도 : 1903년(고종 40년)

• 비석 크기 : 높이 185cm, 너비 61cm, 두께 27cm

• 소재지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 비석군)

• 현재 지정 : 미지정 문화유산

이 비는 권율(權慄)이 이치(梨峙), 행주(幸州) 등의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기반이 광주목사를 한데서 부터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광주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광주에 '창의비(倡義碑)' 를 세운 것이다. 창의비(倡義碑)는 권창섭(權昌燮, 권율의 시문집 "만취당 유적"을 1885년 편집하여 간행함)의 아들 재윤(在允, 권율의 10세손 )이 광주군수로 부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지역의 유림과 후손, 그리고 뜻있는 인사들과 함께 세웠다. 비문은 문인이자 애국지사인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이 짓고, 글씨는 권율의 11세손인 권교현(權敎鉉)이 썼다. 1902년에 송병순(宋秉珣, 우암 송시열의 9세손)에게 글을 받아 1903년 3월에 비를 세웠다. 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권율 막하 장수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첨사 권승경 등 17명이, 오른쪽에는 참좌제공 충무 정충신 등 9명으로 총 26명이다.

권율장군 영정(사진제공 네이버 지식백과)

◾️'금수저' 출신 권율(權慄)

권율(權慄 1537∼1599)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權轍)의 막내아들(다섯째)로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유복한 집안의 전형적인 '금수저 출신'이다. 권율(權慄)은 주변에서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권율(權慄)은 "옛날 주나라 강태공은 현명하여도 나이 80세에 출사를 하였고 나는 아직 마흔밖에 안되었고 재덕 또한 그에 비하면 반에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공명을 바랄 것인가" 하며 벼슬에 나가는 것을 조급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 권철(權轍)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1582년(선조 1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위가 되는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 1556~1618)보다 2년이나 늦게 관직에 나갔다.

권율(權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지냈지만 행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된 신세였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직책이 없던 권율(權慄)을 광주 목사 자리에 앉히고, 정읍 현감(종 6품)이었던 이순신(李舜臣)을 전라 좌수사(정 3품)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을 천거한 사람은 영의정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었다. 육지에서는 권율(權慄),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냈다.

권율장군이치대첩비전경, 이치대첩비, 이치전투 지도(사진제공 문화재청, 네이버 지식백과)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낸 '이치대첩(梨峙大捷)'

56세의 늦은 나이에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權慄)은 전라도 순찰사(巡察使)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임진왜란 중에서 최대 패전인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패전하여 순찰사 이광(李洸)은 해임되었고 권율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안정적으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병참기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한편 왜군의 첩보를 입수한 권율은 남원과 광주 등지에서 의병 약 1,500여 명을 모집하여 동복 현감 황진(黃進)과 함께 전주성에 입성한 후 이치(梨峙, 배나무가 많아서 이치라 함)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이치(梨峙)는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준한 길이다. 권율(權慄)은 조총과 칼로 무장한 채 진격해오는 만여 명의 왜군을 맞아 강력하게 저항했고 마침내 왜군은 퇴각 하므로써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이때 의주로 파천해 있던 선조에게 이치대첩의 승전보를 전한 이가 바로 16세의 어린 소년, 금남군 정충신(錦南君 鄭忠信, 1576~1636)으로 광주광역시 '금남로' 도로명의 주인공이었다.

권율장군 영정, 대첩비각, 토성, 행주대첩행주대첩도(사진제공 문화재청)

그 이듬해인 1593년 2월, 권율 장군은 2,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른바 한산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그해 6월에 권율은 조선의 최고 사령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훗날 장군의 사위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에 따르면 권율은 행주대첩보다는 '이치 전투'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공이었다고 말한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후 복구에 기력을 소진한 나머지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조선 최대의 전쟁, 임진왜란 -여자들 까지 힘을 합해 일본군을 물리친 행주대첩 장면들...(사진제공 네이버 지식백과)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權慄 將軍)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광주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자료이다. 따라서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임진왜란의 역사와 권율 장군(權慄 將軍)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시켜주는 소중한 유산이 되도록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과 함께 광주공원 내 비석군에서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를 살펴보고 설명하는 김오현 기아국가유산지킴이 고문(사진촬영 박정세)

🔳 참고문헌

1. 김영헌, [권율과 전라도 사람들], 심미안, 2012.

2. 정인서, [권율-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18.

3. 임영열, [친일파와 한자리에 선 권율 장군의 '서글픈' 현실], 오마이뉴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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