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마을에 있던 대문이 큰 집은 '대문안 집'이라고 불렸는데, 그곳에는 때까우(거위)가 있어 심부름을 갈 때는 항상 조심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김순복 문중 당숙께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에 앞장서셨다고 하니, 그분의 용감함과 애국심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 당숙께서 살았던 '대문안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의 시대적 배경
1920년대는 신학문과 새로운 이념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족 자강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식민지 정책을 통해 수탈과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일제와 조선인 사이에도 갈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갈등은 독립운동을 염원하며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중심세력으로 신학문으로 무장한 중등학교 학생들이 떠오르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의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한 이들 학생들의 항의형태로 동맹휴학(同盟休學)이 가장 많았는데 그 이유는 학교의 설비, 학교 규칙, 교칙에 불합리한 내용들이 담긴데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 후반 들어서면 중등학교에서 발생한 동맹휴학(同盟休學, 일명 맹휴)건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또 맹휴(盟休)와 함께 학생들 사이에는 새로운 이념과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가장 먼저 조직된 학생들의 비밀결사가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현 광주제일고)생과 광주공립농업학교(光州公立農業學校, 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생 16명이 참여하여 결성한 "성진회(醒進會, 깨달아서 나아간다는 뜻)"였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성진회 출신의 장재성(張載性, 1908 ~1950)은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를 네트워크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1929년 6월 양림동 양파정에서 광주고보(光州高普),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전남사범학교(全南師範學校, 현 광주교육대학교) 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서회 중앙본부' 조직에 합의하고 창립을 보게 되었다. 책임비서는 동경 중앙대학 재학 중인 장재성(張載性), 조사선전위원은 김상환(金相奐, 광주고보).김보섭(金普燮, 광주고보), 조직교양위원 송동식(宋東植, 전남사범).김순복(金順福, 광주농교), 출판위원 조길룡(曺吉龍, 광주농교).이신형(李信珩, 전남사범), 재무위원 강달모(姜達模, 광주농교).윤창하(尹敞夏, 광주고보)로 구성됐다. 독서회 중앙본부가 조직되면서 각급 학교 독서회도 곧이어 구성되었는데 6월 하순 무등산 중머릿재에서 광주고보와 광주농교 독서회가, 7월 초순에는 양림동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전남사범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광주여고보는 장재성(張載性)의 동생 장매성(張梅性)에 의해 1928년 11월 소녀회를 구성하였다. 각 학교에 구성된 독서회는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고, 곧이어 있을 11월 3일과 12일 학생독립운동 시위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모임은 1945 년 해방이 될 때까지 광주.전남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김순복(金順福, 1908 ~ 1929) 선생
1908년 3월 26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망운면(望雲面) 동암리(東巖里, 현 운남면 동암리)에서 태어났다. 광주공립농협학교(光州公立農業學校, 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1920년대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광주에서도 청년, 사상단체들에 의해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한 연구회와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그 영향으로 광주고보(光州高普), 광주농교(光州農校)학생들은 성진회(醒進會, 1920년대 중반 전라남도 광주에서 조직된 항일 학생 비밀결사 단체)를 결성하였으나 1927년 3월 해산 하였다. 성진회 해산 후에도 학교별 연구·독서 모임은 지속되었으며 전남사범학교(全南師範學校, 현 광주교육대학교) 학생들도 독서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성진회(醒進會) 때의 연합을 기반으로 서로 연계하였다. 이때 조길룡(曺吉龍)·정욱(鄭昱)·권수동(權壽童)·김남철(金南哲)·이영범(李榮範) 등과 함께 광주농교(光州農校)에서 3개반으로 확대 개편한 사회과학 연구모임을 이끌었다.
1929년 6월, 광주고보 졸업생인 장재성(張載性)의 주도로 광주농교(光州農校), 광주고보(光州高普), 전남사범(全南師範) 학생들과 함께 각 학교 연구회와 독서모임을 통합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조직은 책임비서 장재성을 중심으로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 출판부, 재정부로 구성되었다. 이 때 조직교양부 위원을 맡아 반 편성 및 공산주의 연구방법 지도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주 1회 회합·협의할 것, ▲3개 학교별로 독서회를 조직한 뒤 중앙본부에 연락할 것, ▲학교별 결사원에게 중앙본부의 존재를 비밀로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광주공립농업학교 독서회를 만들었다. 재정부,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서도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부터 9월 사이 자신의 집과 장재성(張載性)의 집에서 여러 차례 회합을 통해 단결을 도모하고, 독서회 회원의 결속 강화 및 독서회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소비조합(消費組合)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독서 회원들로부터 1구좌 당 3원씩 총 300원의 기금을 마련해 소비조합이 경영하는 문방구점을 열어 회원들의 집합장소로 사용함으로써 독서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학교별 결사원(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한 사람)들과 함께 지방 청년에게 공산주의 선전 및 일제에 대한 투쟁을 독려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활동, 또한 이영범(李榮範) 등과 함께 하계 방학 중 자본계급 및 일제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농업 학교의 독서회원들에게 배포하는 등의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 을 열심히 하던중 1929년 10월 학교행사 때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29년10월 23일 사망하였다. 그후 70여년이 지난 2001년 02월 10일 모교인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光州自然科學高等學校, 구 광주공립농업학교)에서는 그 공적을 찬양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고, 2001년 08월 15일 국가보훈처에서 정부포상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2004년 11월 05일 김순복의 묘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묘지번호141)으로 안장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순복(金順福) 선생은 1929년 광주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 장재성(張載性)의 주도로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사범학교의 학생들이 연합하여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할 때 참여하여 조직교양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각 학교 단위로 독서회 조직을 확장하여 광주농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활동 하였으며 회원들을 중심으로 소비조합을 결성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김순복(金順福) 선생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초기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비록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참고문헌
1. 박치홍, [독서회중앙부삼교독서회사건<예심종결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2018.
2. 정혜인, [학생운동 김순복],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
3. 김성, [광주와 일제하 항일 독립운동],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2021.
4. 강정애,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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